[Ai 창작 소설] 그리니치 오차: 표준시 이전의 너 - 3장 제7수문 아래의 기록
3장
제7수문 아래의 기록
북쪽 수문길은 은종 시민들조차 잘 쓰지 않는 길이었다.
원래는 물길 관리인과 수차 기술자들이 오가던 정비로였지만, 대조율 이후 도시 외곽 물길 상당수가 중앙 공시망 아래 재편되면서 대부분 폐쇄되었다. 남은 길은 잡초와 부서진 석축, 반쯤 무너진 안전난간뿐이었다. 날이 밝으면 아이들이 몰래 숨바꼭질을 하러 오는 곳이었고, 비가 많이 온 날에는 떠내려온 나무토막과 쓰레기가 잔뜩 걸리는 지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의 수문길은 평소와 달랐다.
길 전체가 지나치게 고요했다.
물이 흐르고 있는데도 소리가 반 박자 늦게 따라왔다.
발밑 자갈은 분명 밟히는데, 발자국 소리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나는 것 같았다.
서진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뒤를 본다는 건 확인하는 행위였고, 확인은 때로 현실을 고정시켰다. 지금 같은 날엔, 고정되어 버린 것이 반드시 자기 편일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는 금속 상자를 옷 안쪽에 밀어 넣고, 젖은 셔츠 위로 외투를 더욱 조여 잡았다. 오른손엔 여전히 유란이 건넨 훼손된 기록관 패가 들려 있었다. 얇은 금속판 가장자리는 차갑고 거칠었으며, 표면의 긁힌 자국 사이로 희미한 번호가 남아 있었다.
기록보정부 임시보조관 제4열 17번.
이상하게도 그 번호를 본 순간, 머릿속에 낯선 방 하나가 스쳤다. 천장까지 닿는 서고. 젖은 종이 냄새. 그리고 아주 멀리서 누군가가 서랍을 닫는 소리.
서진은 곧장 시선을 떼었다.
오늘은 이미 너무 많이 봤다.
강변의 폐기 수문 관리소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른 건물과 달리 지붕이 거의 무너져 있었고, 입구 위 금속 팻말 절반이 떨어져 나간 채 “북측 수문 제…”까지만 남아 있었다. 문은 비틀린 채 한쪽 경첩에만 걸려 있었고, 안쪽엔 오래 방치된 나무 책상, 깨진 유리병, 녹슨 레버 같은 것들이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서진은 한동안 건물 바깥에 서서 안을 살폈다.
사람 기척은 없었다.
물 흐르는 냄새, 녹슨 철 냄새, 오래된 기름 냄새.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마른 잉크 냄새.
그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은 축축했고, 오래된 기록대 위엔 물때 자국이 층층이 남아 있었다. 벽 쪽에는 수문 높이를 측정하던 눈금판이 기대어 있었는데, 숫자 절반이 물에 지워져 있었다. 창문은 유리가 거의 다 깨져 있었고, 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종잇장 부스러기를 아주 조금씩 움직였다. 어쩌면 이곳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버려졌을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누군가 손댄 흔적이 있었다.
벽면 한쪽 구석, 먼지층이 끊긴 자리가 보였다.
최근에 누가 기대 서 있었던 듯한 자국.
바닥의 얕은 발자국.
그리고 창 아래 놓인 빈 나무 상자 하나.
유란은 이미 이곳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서진은 폐문 쪽이 아니라 안쪽 가장 깊은 벽으로 등을 붙였다. 숨을 고르는 동안, 회중시계와 금속 상자 사이에서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 알 수 없을 만큼 몸이 가라앉았다. 금속 상자는 생각보다 단단했고, 잠금 구조도 단순하지 않았다. 표면엔 윤서가 남긴 회중시계와 같은 별 문양이 있었지만, 이번엔 별 한 개가 아니라 다섯 개 중 두 개가 지워져 있었다.
무슨 뜻일까.
그는 먼저 회중시계를 꺼냈다.
손끝이 아직도 미세하게 저렸다.
뚜껑을 열자 다행히 이번엔 공간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다만 안쪽 눈금 하나가 아주 희미하게 금속 상자를 향해 기울어 있었다. 나침반처럼. 서진은 그걸 한참 들여다보다가 상자 표면의 문양에 회중시계 뒷면을 맞대 보았다.
딸깍.
아주 작은 소리와 함께 상자 옆면의 이음새가 열렸다.
서진은 숨을 멈췄다.
안에는 문서가 한 장만 들어 있었다.
접힌 종이가 아니라, 여러 겹의 얇은 반투명 필름과 금속 박편이 겹쳐진 기록지였다. 중앙에는 손글씨 한 줄이 보였다.
“1차 열람 대상: 서진”
그 글씨를 보는 순간, 서진의 손끝이 굳었다.
어머니의 글씨였다.
기억은 늘 조금씩 흐려지기 마련인데, 어떤 획은 이상할 만큼 오래 남는다. ‘서’ 자를 쓸 때 첫 획을 너무 길게 빼는 습관, ‘진’ 자의 마지막 점이 약간 왼쪽으로 치우치는 방식. 어릴 때 공책 위에 자기 이름을 따라 쓰던 기억이 거의 통증처럼 되살아났다.
그는 한동안 문서를 펴지 못했다.
밖에서는 여전히 진짜 아침이 오지 않은 듯했다.
빛은 있는데 시간대가 없었다.
마치 해가 뜨기 전의 하늘을 누군가 얇게 오려 건물 밖에 붙여 놓은 것 같았다.
서진은 마침내 기록지를 펼쳤다.
가장 위 층의 반투명 막에는 시간 눈금 같은 선이 촘촘히 그어져 있었고, 아래 겹엔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잉크가 들어간 듯했다. 기록지 모서리엔 작은 지시문이 적혀 있었다.
“직접 읽지 말 것. 시간 반응체를 통해 중첩 열람할 것.”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회중시계를 뜻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서진은 기록지 위에 회중시계를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처음엔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러나 몇 초 뒤, 시계 초침이 멈춘 채 아주 미세하게 떨리더니 기록지 아래층의 글자가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서진은 숨도 쉬지 않고 그것을 읽었다.
“이 기록을 읽는 사람이 서진이라면, 적어도 하나는 실패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나는 네가 이걸 읽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동시에, 결국 네가 읽게 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것부터 적어 둔다.
네가 본 것은 병이 아니다.
네가 듣는 것은 환청이 아니다.
네가 남들보다 먼저, 혹은 다르게 시간을 감지한다면, 그건 네 감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설명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너는 오류가 아니다.”
서진은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류가 아니다.
그 문장은 이상하게도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늦게 도착한 판결문 같았다. 몇 년 동안 자기 안에서 썩어 가던 어떤 말이 이제야 이름을 얻은 느낌. 하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믿을 수는 없었다. 너무 오래 반대로 배워 왔으니까. 시계를 가까이하면 구토가 나고, 공시 종이 울릴 때마다 다른 장면이 보이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은 정상일 수 없다고.
기록은 이어졌다.
“공시청은 인간이 같은 시간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말은 절반만 맞다.
인간은 같은 시계를 공유할 수는 있다.
같은 시간을 본질적으로 공유할 수는 없다.
기운은 성질이 아니라 접속이다.
불, 물, 철, 나무, 흙은 네 몸에 붙은 표지가 아니라, 네 생이 어떤 시간 결과 먼저 닿아 있는지를 나타내는 흔적이다.
대부분은 하나의 결만 강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분류가 가능하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하나의 결로 닫히지 않는 아이들이 태어난다.
공시청은 그들을 오류라고 부르며 지우려 하고, 나는 오랫동안 그 분류가 맞는지 의심했다.
그 의심은 네 출생 기록을 본 날 확신이 되었다.
네가 태어난 시각엔, 하나의 기운값으로 닫히지 않는 파형이 나왔다.
나는 네게 이름을 붙이기 전에 네가 사라질 거라는 걸 먼저 통보받았다.”
서진의 눈앞이 잠깐 흐려졌다.
사라질 거라는 걸 먼저 통보받았다.
즉, 어머니는 자신이 태어났을 때 이미 공시청이 자신을 없앨 예정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기록지 가장자리를 너무 세게 쥐었다가 손을 풀었다. 손끝에 맥이 뛰었다. 분노인지, 공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밖에서 바람이 지나가며 깨진 창을 울렸다.
기록은 점점 더 개인적인 말투로 변해 갔다.
“나는 연구관으로서 오래 망설였고, 어머니로서는 거의 망설이지 않았다.
그래서 네 공식 출생은 그날 끝났다.
기록상 너는 죽었다.
실제의 너는 살아남았다.
매옥 어머니가 너를 숨겨 주었고, 나는 제로 메리디안 프로젝트에서 확인한 일부 자료를 분산 은닉했다. 회중시계는 열람 키고, 지금 네가 읽는 이 기록은 첫 번째 분기다.
서진, 네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시계를 부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공시를 지키는 자들이 틀렸다고 해서, 시간이 제멋대로 뒤엉킨 세계가 곧바로 자유는 아니다.
공시는 거짓이지만, 그 거짓은 오랫동안 세계를 버텨 온 틀이기도 하다.
그러니 누군가 네게 모든 시계를 멈추자고 말하면 경계해라.
누군가 네게 같은 시간만이 평화라고 말해도 경계해라.
둘 다 반쪽짜리 답이다.”
서진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 문장은 이상했다.
어머니는 공시청이 자신을 지웠고, 자신을 숨겼고, 이런 기록까지 남길 정도로 진실을 추적했다. 그런데도 “시계를 부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적고 있었다.
그 말은 곧, 어머니가 공시청과 반공시 세력 어느 쪽에도 완전히 서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서진이 희미하게 느껴 왔던 것과 닮아 있었다.
자신은 늘 두 방향에서 동시에 밀려났다.
정상 시간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어긋난 틈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기록지 아래층의 마지막 글이 천천히 떠올랐다.
“다음 기록은 북부 외곽 제11관측소의 잔여 관측실에 남겨 두었다.
그곳은 폐쇄되었지만 완전히 죽지 않았다.
제7수문 상자를 연 뒤 서쪽으로 가라.
혼자 가지 마라.
특히 물의 흔적을 읽는 사람을 믿어도 되는지, 끝까지 확인해라.
그리고 네가 어느 날 ‘7분 먼저 기록된 죽음’의 원인을 알게 된다면,
그날부터는 나를 찾지 말고 내가 막으려 했던 것을 먼저 찾아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남긴다.
절대로 시계보다 먼저 시간을 보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그건 네가 고장 나서가 아니라, 아직 표준시 이전의 너를 완전히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 윤서”
글자가 사라졌다.
기록지는 다시 반투명한 얇은 층들로 돌아갔고, 회중시계 안쪽 눈금도 원래의 낯선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서진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어머니가 남긴 말들은 너무 직접적이어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기억한다고 믿었지만, 정작 어떤 톤이었는지는 오래전에 흐려졌었다. 그런데 지금 읽은 문장들은 음성보다 더 또렷하게 그녀를 되살렸다. 단정하고, 차갑고, 끝까지 감정을 절제한 채 핵심만 말하는 방식. 울지도, 변명하지도 않고, 다만 다음으로 가야 할 길만 남기는 방식.
혼자 가지 마라.
그리고 물의 흔적을 읽는 사람을 믿어도 되는지 끝까지 확인해라.
유란의 얼굴이 떠올랐다.
서진은 그 문장을 다시 곱씹었다. 믿으라는 뜻이 아니었다. 완전히 경계하라는 뜻도 아니었다. 확인하라는 말이었다. 그것은 어머니답게 애매하지 않은 애매함이었다. 상대를 믿을지 말지를 감정이 아니라 흔적으로 판단하라는 뜻처럼 들렸다.
그는 기록지를 다시 접어 상자 안에 넣었다. 그 순간, 바깥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서진의 몸이 즉시 굳었다.
창가 쪽이 아니라, 관리소 뒤편 물길 쪽이었다.
한 사람.
빠르지 않지만 망설이지 않는 걸음.
그는 회중시계를 닫아 주머니에 넣고, 금속 상자를 외투 안쪽 깊숙이 밀어 넣었다. 발소리는 멈췄다. 잠깐 정적이 흐른 뒤, 문 옆 깨진 벽 틈으로 그림자가 스쳤다.
“살아 있으면 대답해.”
유란의 목소리였다.
서진은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바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바깥의 침묵이 길어지자, 유란이 다시 말했다.
“지금은 집행국 둘을 따돌렸지만 오래는 못 가. 안에 있다면 빨리 나와.”
서진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문 가까이 가기 전, 그는 다시 한 번 주머니 속 기록관 패를 만졌다. 유란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면 굳이 저걸 남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았다.
문을 밀자, 유란이 반쯤 젖은 채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목도리는 사라졌고, 오른쪽 소매 끝이 찢겨 있었다. 눈가엔 피로가 번져 있었지만 시선은 여전히 또렷했다.
그녀는 서진의 얼굴을 본 뒤 짧게 물었다.
“상자 열었어?”
“열었어요.”
“뭐가 있었지.”
“왜 바로 그걸 묻죠. 내가 다친 건 아닌지부터 묻는 게 먼저 아닌가.”
유란은 잠깐 말을 멈췄다. 그 표정은 놀람과 짜증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었다.
“그 질문을 먼저 들을 줄은 몰랐네.”
“대답해요.”
“상자 내용이 지금부터의 행동을 바꾸니까.”
“당신 기준으로?”
“우리 둘 다.”
서진은 그녀를 한동안 바라봤다.
유란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머니 기록이 있었어요.”
그가 마침내 말했다.
“그리고 제11관측소로 가라고 했어요.”
유란의 눈빛이 처음으로 아주 분명하게 흔들렸다.
“북부 외곽?”
“알고 있었어요?”
“관측소가 남아 있었다는 소문만.”
“또 하나 있었어요. 물의 흔적을 읽는 사람을 믿어도 되는지 끝까지 확인하라고.”
유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깐, 물길 소리만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그러다 그녀가 아주 낮게 말했다.
“그건 현명하네.”
서진은 그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 변명하거나 화낼 줄 알았다. 하지만 유란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요.”
그녀가 이어 말했다.
“지금 확인은 어디까지 했어?”
서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유란은 피곤한 눈으로 관리소 안을 한번 훑어본 뒤, 깨진 창 아래 돌턱에 걸터앉았다. 젖은 외투 끝에서 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좋아. 그럼 내가 하나 먼저 말하지. 우리 아버지 이름은 유도한이었어. 기록보정부 제2보관서고 책임자였고, 11년 전 ‘문서 보정 사고’로 실종 처리됐어. 그런데 공식 사망 기록이 사고 발생보다 4분 먼저 등록돼 있었지. 네 어머니 건과 완전히 같은 방식은 아니어도, 같은 손이 닿았을 가능성이 컸어.”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난 오래전부터 지워진 문서의 흔적을 읽었어. 공식으론 그 능력을 보고 업무 적성이 있다고 했지. 실제론 더 깊이 들어가면 안 됐는데 들어가 버린 거야.”
“그래서 공시청을 나왔어요?”
“나온 게 아니라 밀려났지.”
“왜 나를 바로 찾았죠?”
“은종 출생 폐기문서에서 네 이름을 봤으니까.”
유란은 서진 쪽을 봤다.
“정확히는, ‘죽은 것으로 등록된 아이’ 뒤에 남은 두 번째 리듬을.”
서진은 그 말이 어떤 방식으로 사실인지, 어떤 방식으로 감정인지 판단하려 애썼다. 아직은 절반쯤만 믿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절반은 전에 없던 종류의 확실함이었다. 유란은 필요한 만큼만 말했고, 자신을 무조건 신뢰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공시청은 지금 은종 사건을 어떻게 볼까요.”
서진이 물었다.
유란은 곧바로 답했다.
“표면적으론 공시 장치 오작동과 집단 조율 불안. 내부적으론 무결인 개입 가능성.”
“나를?”
“가능성이 아니라 거의 확정 대상으로 볼 거야.”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관리소 바깥 멀리서 종소리 비슷한 것이 들렸다. 그러나 은종 종탑 소리는 아니었다. 더 멀고, 더 금속적이며, 더 균일했다. 도시 외곽 검문소에서 보내는 공시청 호출 신호였다.
유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 없어. 은종 전체가 곧 봉쇄돼.”
“봉쇄되면?”
“출입 기록 확인, 철로 폐쇄, 수문 통제, 지역별 시계 재동조. 네 얼굴은 오늘 안에 북부 전역에 배포될 거고.”
서진은 금속 상자를 더 깊이 품에 눌렀다.
“그럼 바로 제11관측소로 가야겠네요.”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길이지.”
“걸어서 가면—”
“안 돼. 북부 외곽 철로는 전부 공시청 감시망 아래야.”
“그럼 방법이 있나요?”
유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있을 수도.”
“있을 수도?”
“확실한 방법이면 내가 벌써 말했겠지.”
그녀는 관리소 구석에 쓰러진 수문 지도판으로 다가가 먼지를 털어냈다. 종이가 아니라 얇은 방수 천 위에 옛 물길과 정비 통로가 그려진 지도였다. 절반은 찢겨 있었지만 북부 외곽 방향 수로와 폐선 몇 개가 남아 있었다.
유란이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짚었다.
“은종 북서쪽 18리 지점. 예전 화물 분기선이 하나 있어. 지금은 공식 폐선인데, 공시청이 긴급 봉쇄에 들어가면 오히려 주 통로만 더 세게 잡고 이런 데는 대응이 느려져.”
“거기까지 가서 뭘 해요.”
“사람을 만나.”
“누구를.”
유란은 대답 대신 입술을 굳혔다.
서진은 즉시 알아챘다. 숨기고 있다.
“누구냐고요.”
“단휘.”
“누군데요.”
“불의 결 사용자. 원래는 내가 믿고 싶지 않은 종류의 인간인데, 지금은 선택지가 많지 않아.”
“믿고 싶지 않은 이유는.”
“시작되기 전의 가능성만 보고 돌진하는 타입이거든. 보통 그런 사람들은 남의 후폭풍을 잘 안 봐.”
유란의 말은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이미 몇 번이고 부딪쳐 본 사람을 말하는 피로가 들어 있었다.
서진은 다시 지도를 봤다.
북서쪽 18리.
폐선 분기점.
그리고 그다음은 제11관측소.
모든 게 너무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은종에서 조용히 일상을 버티고 있었고, 오늘 새벽엔 어머니 방 바닥 밑 시계를 찾았고, 지금은 자신이 죽은 아이로 등록된 무결인일 가능성을 안 채 도시 밖으로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너무 빨라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그때, 주머니 속 회중시계가 아주 짧게 떨렸다.
틱.
둘 다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시계는 닫힌 상태였지만 금속 표면이 미묘하게 미지근해져 있었다. 서진은 천천히 꺼내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유란이 물었다.
“또 반응해?”
“네.”
“열지 마. 지금은—”
하지만 이미 늦었다. 뚜껑이 스스로 반쯤 벌어졌다.
아주 짧은 섬광 같은 것이 둘 사이를 스쳤다.
서진은 물러서며 숨을 삼켰다.
유란은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같은 장면을 본 듯 동시에 굳었다.
철로 위에 선 사람 하나.
붉은 신호등.
아직 도착하지 않은 열차의 굉음.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
“늦으면 분기점이 아니라 사람부터 잃는다.”
장면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유란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지금 본 거, 너도 들었지?”
서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 지체하면 안 되겠네.”
유란이 말했다.
“단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기 전에 뭔가에 말려들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야.”
“지금 그걸 단정할 수 있어요?”
“불의 결이 낀 장면은 항상 ‘곧 시작될 것’ 쪽으로 쏠려. 그리고 철로, 붉은 신호등, 사람 하나. 우연이면 오히려 더 싫어.”
유란은 곧장 지도판을 말아 들고, 남은 소지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움직임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서진은 시계를 닫으며 물었다.
“우리는 왜 자꾸 이렇게… 먼저 보게 되는 거죠.”
유란은 한순간 대답을 멈췄다.
그리고 아주 짧게, 거의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말했다.
“아마 누군가는 오랫동안 같은 시간을 강요당해 왔고, 누군가는 아직 거기서 덜 잘렸기 때문이겠지.”
그 말은 기록 속 윤서의 문장과 닮아 있었다.
표준시 이전의 너를 잃지 마라.
서진은 더 묻지 않았다.
관리소 바깥으로 나왔을 때, 하늘은 드디어 밝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밝음은 아침 같지 않았다. 너무 늦게 도착한 새벽 같았다. 은종 시내 쪽으로는 얇은 안개와 함께 공시청 봉쇄등이 푸르게 떠 있었고, 북부 외곽 쪽 하늘엔 철로 신호탑의 붉은 불빛이 점처럼 박혀 있었다.
도시는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채, 같은 시계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멈춰 있었다.
유란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북서쪽 폐선까지 두 시간. 서둘러.”
서진도 뒤따랐다.
몇 걸음 옮긴 뒤, 그는 문득 뒤를 돌아 은종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아주 멀리 종탑 꼭대기에서 누군가 서 있는 듯한 형체가 보였다.
검은 외투.
고정된 자세.
사람인지 그림자인지 알 수 없는 실루엣.
서진이 눈을 한번 깜빡이는 사이, 형체는 사라졌다.
“왜 멈춰.”
유란이 재촉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무언가가 이미 자신을 보고 있다.
공시청일 수도 있고, 어머니가 막으려 했던 더 오래된 무엇일 수도 있다.
서진은 다시 몸을 돌렸다.
북쪽으로 향하는 길은 아직 비어 있었지만, 오래 비어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한편, 은종 중심부의 공시청 임시봉쇄본부에서는 같은 시각, 다른 종류의 기록이 시작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은종 공시청 임시봉쇄본부
“세 번째 사망자는?”
“발견 당시 생체 반응 없음. 공식 사망 시각은 공시 복구 후 재기록 예정입니다.”
“공시 복구 후?”
낮고 마른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은종 봉쇄본부 중앙에는 임시 조율판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제복 위에 다른 집행자들보다 훨씬 단순한 금속 장식을 단 인물. 계급 표식이 거의 없는데도, 방 안 누구도 그의 시선을 오래 받지 못했다. 원감시관 도해율. 중앙 공시원에서 직접 파견된 인물이었다.
그는 보고서를 넘기지도 않고 물었다.
“시각이 없던 죽음을 어떻게 재기록하지?”
현장집행관이 대답을 고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
“통상 절차에 따라 종탑 재동조 이후—”
“통상 절차가 통하지 않는 사건이다.”
도해율의 시선은 보고자가 아니라 테이블 위 검은 측정판에 꽂혀 있었다. 그 위에는 은종 전역에서 회수한 손목시계 열세 개가 놓여 있었다. 모두 멈춘 시각이 달랐다.
“현장 불응 반응자 보고.”
다른 집행관이 앞으로 나섰다.
“총 열일곱 명. 그중 중증 셋. 집단 환시 주장 여섯. 시간 착오 보고 다수.”
“무결 반응은.”
잠깐 침묵이 흘렀다.
“한 건 추정.”
도해율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추정?”
“북구역 민가. 출생 기록상 문제없는 흙 계열 남성 청소년으로 확인되나, 현장 회피 반응 속도가 공시 예측보다 선행했습니다. 측정기 재검 직전 이탈. 현재 추적 중입니다.”
도해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정적이 오히려 더 위협적이었다.
잠시 후 그가 물었다.
“이름.”
“강서진.”
그 이름이 방 안 공기를 아주 조금 바꾸었다.
기록보정부에서 파견된 보정관 하나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도해율의 시선을 받고 다시 숙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옆의 보조 서류를 넘겼다.
“해당 인물… 출생 기록 재조회 중 이상값이 발견되었습니다.”
“무슨 이상값.”
“사망 등록 이력이 있습니다.”
도해율의 눈빛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움직였다.
“언제.”
“출생 당일.”
“그런데 현재 생존 중이다?”
“…예.”
“좋군.”
그 말이 칭찬이 아니라는 것을 방 안 모두가 알았다.
도해율은 천천히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은종 북구역 지도를 짚었다. 그의 손가락은 민가, 제분소, 하부 수로, 그리고 북측 수문길로 이어지는 얇은 선 위를 느리게 지나갔다.
“이건 우발적 조율 사고가 아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누군가 남겼고, 누군가 열었고, 지금 누군가가 그것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
그는 시선을 돌려 현장집행관에게 명령했다.
“북서 폐선 분기점 봉쇄. 기록보정부 잔존 인원 조회. 윤서 관련 폐기문서 전부 2급 봉인 해제 요청.”
잠시 멈춘 뒤, 아주 낮게 덧붙였다.
“그리고 중앙에 보고해. 은종 사건은 ‘그리니치 오차’ 계열로 재분류한다.”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방 안에 있는 몇몇 사람의 얼굴이 굳었다.
공식 석상에서 거의 금기처럼 취급되는 단어였다.
도해율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대시정께 직접 올라갈 것이다.”
푸른 봉쇄등이 창밖에서 한 번 점멸했다.
은종의 시계는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는데, 누군가는 이미 훨씬 오래된 사건의 이름을 꺼내 들고 있었다.
그리고 북쪽으로 달아나는 두 사람은 아직 그 사실을 몰랐다.
'Ai > Chat GPT' 카테고리의 다른 글
| [Ai 창작 소설] 그리니치 오차: 표준시 이전의 너 - 5장 능선 아래 제11관측소 (0) | 2026.03.16 |
|---|---|
| [Ai 창작 소설] 그리니치 오차: 표준시 이전의 너 - 4장 북서 외곽 폐선 분기점 (1) | 2026.03.16 |
| [Ai 창작 소설] 그리니치 오차: 표준시 이전의 너 - 2장 멈춘 시계들의 도시 (1) | 2026.03.14 |
| [Ai 창작 소설] 그리니치 오차: 표준시 이전의 너 - 1장 은종의 새벽 (0) | 2026.03.14 |
| [Ai 창작 소설] 그리니치 오차: 표준시 이전의 너 - 제1화 프롤로그 (0) | 2026.03.1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