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창작 소설] 그리니치 오차: 표준시 이전의 너 - 5장 능선 아래 제11관측소

Ai/Chat GPT|2026. 3. 16.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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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능선 아래 제11관측소

북서 능선 아래의 공기는 도시와 달랐다.

은종에선 늘 금속 냄새가 먼저 났다. 공시등을 둘러싼 전선의 열기, 종탑 내부의 기름, 수차 축에 밴 물기와 쇠 냄새, 사람들 손목에 닿은 시곗줄의 차가운 냄새. 그런데 능선 아래로 들어서자 그런 냄새가 하나씩 옅어졌다. 대신 젖은 흙, 바위 틈에 고인 찬물, 오래된 침엽수 껍질 냄새가 더 가까워졌다. 마치 이쪽은 아직 도시의 시간이 덜 닿은 영역인 것 같았다.

단휘가 앞장서고, 유란이 그 뒤를 따르고, 서진은 가장 뒤에서 걸었다.

한재록은 여전히 단휘의 등에 업힌 채 의식이 없었다. 다친 다리는 유란이 급히 고정해 둔 천 아래에서 부자연스럽게 굽어 있었다. 숨은 붙어 있었지만 얕았다. 얼굴빛도 좋지 않았다. 분기 장치 아래 오래 끼어 있었던 데다, 기록 없는 열차가 통과할 때 받은 충격까지 겹친 탓일 것이다.

산길은 점점 좁아졌다. 북서 외곽 폐선 분기점에서 벗어난 뒤로 공시청의 직접적인 추적 신호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조용한 구간이 더 위험할 수 있다. 도시는 봉쇄되고 있고, 자신들은 이동 중이며, 공시청은 이미 이 방향을 예측했을 가능성이 높다.

단휘가 낮게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쉰다.”

유란이 곧바로 되물었다.
“은폐소까지?”

“응.”

“거기 아직 안 털렸다는 확신은.”

“없지.”

“그럼 왜 그리 태연해.”

단휘는 잠시 웃는 듯 숨을 뱉었다.
“지금 확신 있는 게 하나라도 있어?”

유란은 대꾸하지 않았다.

서진은 둘의 대화 사이에 끼지 않았다. 대신 능선 위쪽을 바라봤다. 나무들 사이로 회색 구조물이 아주 희미하게 드러났다. 직선으로 뻗은 벽체, 무너진 듯하면서도 아직 버티고 있는 탑 부분, 그리고 정상 부근의 둥근 관측 돔. 북부 외곽 제11관측소였다.

멀리서 볼수록 더 이상한 건물이었다.

폐쇄된 시설이라면 죽은 느낌이 나야 하는데, 저곳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이 살고 있는 기운은 전혀 없는데도, 마치 어떤 기능 하나만은 아직 끝내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진은 그 광경을 볼 때마다 목 뒤쪽이 묘하게 당기는 감각을 느꼈다. 어머니가 다음 기록을 남겨 두었다고 한 장소. 공시청이 폐쇄했지만 완전히 죽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장소. 자신이 반드시 가야 하는 장소.

그리고 아마,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의 틀을 한 번 더 벗겨 낼 장소.

“서진.”

유란이 불렀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유란은 그의 어깨 쪽을 보고 있었다. 폐선 분기점에서 파편이 스친 왼쪽 어깨의 붕대는 이미 다시 젖기 시작했다.

“팔 감각 어때.”

“들려요.”

“통증은.”

“참을 만해요.”

“그 말은 보통 참을 만하지 않다는 뜻이야.”

단휘가 끼어들었다.
“걸을 수 있으면 됐어.”

유란이 쏘아붙였다.
“넌 남의 몸 상태를 너무 쉽게 넘겨.”

“넘기는 게 아니라 우선순위 정하는 거지.”

“그 우선순위 때문에 죽는 사람이 생겨.”

단휘의 발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살렸잖아.”

그 짧은 한마디에 공기가 순간 가라앉았다.

유란은 더 말하지 않았고, 서진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 오래된 마찰이 있다는 건 분명했다. 단순히 성격 차이만은 아니다. 서로의 방식이 다르고, 그 방식 때문에 이미 잃은 것이 있는 사람들 사이의 침묵이었다.

능선 아래 은폐소는 바위와 바위 사이를 메운 반쯤 무너진 저장고였다.

겉에서는 그냥 낙석 아래 일부가 파묻힌 폐창고처럼 보였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생각보다 깊었다. 오래전 관측소 보급품을 쌓아 두던 곳이었는지, 바닥은 돌이 아니라 깔끔하게 다진 판석이었고 벽면엔 녹슨 고리와 선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천장 일부는 무너져 있었지만 핵심 공간은 살아 있었다. 바깥쪽은 얼핏 비어 보이도록 꾸며 놓았고, 안쪽 좁은 틈을 지나면 사람이 여럿 숨을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단휘가 한재록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일단 여기선 소리만 안 내면 돼.”

서진이 둘러보며 물었다.
“여길 혼자 만든 거예요?”

“아니. 원래 있던 걸 손본 거지.”

“누구랑.”

단휘는 고정 끈을 풀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답했다.
“그건 나중에.”

서진은 더 묻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선 질문 하나하나가 너무 곧장 사람의 과거를 건드렸다.

유란은 곧장 한재록 옆에 무릎을 꿇었다. 맥을 짚고, 눈꺼풀을 들어 보고, 부목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열은 아직 없네. 다리 상태는 좋지 않지만 당장 절단 수준은 아니야.”

“깨울 수 있어요?”
서진이 물었다.

“억지로는.”

“하면 안 되나요.”

“지금 깨우면 말 대신 비명부터 나올 수도 있어. 그리고 저 상태로는 기억도 섞일 가능성이 커.”

서진은 한재록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철로 아래 끼여 있던 때보다 더 창백했다. 그러나 얼굴선은 의외로 날카롭고 젊었다. 공시청 기술자라고 해서 중년쯤일 거라 생각했는데, 많아야 서른 초반처럼 보였다. 종탑관리국 기술자. 북부 외곽 정비반. 제11관측소 폐쇄 이후 잔류 시설 점검까지 맡았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

이 사람은 무엇을 봤을까.

그리고 왜 북서 외곽 폐선 분기점의 분기 장치 아래에 끼어 있었을까.

단휘는 저장고 안쪽 선반에서 금속 물통, 오래된 담요, 작은 손전등 두 개를 꺼내 던지듯 내려놓았다.
“물은 조금 있고, 불은 피우면 안 돼. 밤 되면 더 추워지긴 하겠지만.”

유란이 물었다.
“약은.”

“진통제 조금. 소독약 약간.”

“이런 걸 은폐소라고 부를 수는 있겠네.”

“살아남으려면 충분하잖아.”

유란은 피곤한 눈으로 그를 한번 봤다가, 결국 더 비꼬지 않았다.

서진은 저장고 벽에 기대 앉았다. 몸이 이제야 상황을 따라잡는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벌어졌다. 새벽의 은종, 어머니 방 바닥 밑 회중시계, 광장의 피, 공시청 집행자들, 제분소, 제7수문 아래 기록, 북서 외곽 폐선 분기점, 기록 없는 열차. 정신은 계속 다음 장면으로 밀려가는데 몸은 아직 첫 장면에 절반쯤 묶여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폐선 분기점에서 분기 장치에 내리치면서 한쪽이 조금 찌그러졌지만, 시계는 완전히 망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금속 표면에 전보다 더 미세한 선들이 드러나 있었다. 얕은 금이 간 자리가 아니라, 애초에 숨겨져 있던 눈금이 충격으로 더 보이게 된 듯했다.

유란이 그걸 보더니 가까이 왔다.
“열어 봤어?”

“아직요.”

“지금은 열지 마.”

“왜요.”

“너 오늘 이미 너무 많이 열었어.”

단휘가 멀찍이서 코웃음쳤다.
“그럼 안 열고 어떻게 관측소까지 가는데.”

유란이 돌아보며 말했다.
“시계는 길잡이이기도 하지만 소모품이 아냐. 저게 먼저 깨지면 우린 다음 기록을 못 읽어.”

단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게 먼저 깨질지, 우리가 먼저 잡힐지 누가 아냐.”

“넌 모든 걸 속도 문제로만 보지.”

“대부분은 속도 문제 맞아.”

“대부분은.”

유란은 단어 하나를 강하게 찍고는 다시 서진 쪽을 봤다.
“기록지 보여 줘.”

서진은 금속 상자에서 어머니의 첫 기록지를 꺼내 유란에게 건넸다. 유란은 그것을 함부로 펼치지 않았다. 손끝으로 재질을 먼저 확인하고, 빛에 비추고, 겹쳐진 층의 방향을 살폈다. 기록을 보는 사람의 버릇이었다.

“정교하네.”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조율연구부에서도 상위 등급 반응체를 쓴 거야.”

단휘가 들으며 물었다.
“그 말은?”

“윤서가 생각보다 더 깊숙한 데 있었다는 뜻.”

서진은 고개를 들었다.
“조율연구부 안에서도요?”

“응. 이런 기록을 개인이 빼돌릴 수 있으려면 단순 연구관은 힘들어.”

유란은 기록지 가장자리에 남은 미세한 각인을 손톱으로 짚었다.
“게다가 이건 공식 보관용이 아니라 이동용이야. 누가 언제 어느 조건에서 읽을지까지 계산해 만든 거지.”

“어머니가 내가 읽을 걸 알고 있었다고 했어요.”

“알았겠지. 혹은, 읽게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거나.”

그 말은 이상하게도 조금 아팠다.
서진은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했는지 의심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사랑과 계획이 겹칠 때, 그 안의 감정은 종종 더 복잡해진다. 자신은 구해진 아이였고 동시에 남겨진 열람 대상이기도 했다.

단휘가 저장고 입구 쪽에 기대 앉으며 물었다.
“그래서 다음 기록은 관측소 안 어디 있다는 거야.”

서진이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어머니 기록엔 그냥 ‘제11관측소의 잔여 관측실’이라고만 있었어요.”

“잔여 관측실?”
단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유란이 대신 설명했다.
“관측소는 보통 주관측실, 보조관측실, 계산실, 기록실로 나뉘어. 폐쇄 과정에서 일부는 철거되고 일부는 봉인되는데, ‘잔여 관측실’이라는 표현이면 공식 폐쇄 이후에도 기능이 조금 남은 실을 뜻할 수 있어.”

“그러니까 안 죽은 방이라는 거네.”

“표현은 너답네.”
유란이 말했다.

단휘는 웃지 않았다.
“중요한 건 한재록이 그 안을 알고 있느냐잖아.”

셋의 시선이 동시에 한재록에게 향했다.

기술자는 아직 의식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보다 호흡이 덜 불안정해 보였다. 유란은 잠시 생각하다가 진통제와 물을 조금 준비했다.

“깨워야겠어요?”
서진이 물었다.

“지금은 아니고, 곧.”
유란이 말했다.
“조금이라도 정신이 붙었을 때 짧게 물어봐야 해. 길게 끌면 안 돼.”

단휘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너, 심문도 하냐.”

“기록관은 묻는 법을 배워. 사람을 부수는 법 말고.”

“공시청은 둘 다 가르치던데.”

유란의 손이 잠깐 멈췄다.
하지만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정적이 잠깐 저장고 안을 채웠다.

그때 한재록이 낮게 신음했다.

셋이 동시에 몸을 굳혔다.
한재록의 눈꺼풀이 떨렸고, 손가락이 한번 움켜쥐듯 움직였다. 유란이 즉시 가까이 앉아 목소리를 낮췄다.

“한재록. 들리면 눈만 떠.”

몇 초 뒤, 한재록이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초점은 흐렸고, 통증 때문인지 숨도 불규칙했다. 그러나 완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천장, 돌벽, 단휘, 유란을 차례로 훑다가 마지막으로 서진에게 멈췄다.

그리고 그 순간, 얼굴색이 더 하얘졌다.

“안 돼…”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오면 안 돼…”

유란이 즉시 물었다.
“뭐가 안 돼. 제11관측소?”

한재록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통증이 먼저 몰려오는 것 같았다. 유란이 진통제를 조금 먹이고, 물을 입에 적셔 준 뒤 다시 물었다.

“한재록. 네가 폐선 분기점에 있었던 이유는.”

“막으려고…”

“뭘.”

“열차를…”

단휘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왜.”

한재록은 눈을 감았다 뜨며 겨우 말했다.
“관측소에서… 내리는 걸… 막아야 해서…”

서진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
“뭘 내리는데요.”

한재록이 그를 봤다.
그 시선엔 공포와 망설임, 그리고 이상하게도 알아본 사람을 보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네가… 왜…”

유란이 단호하게 끊었다.
“그건 나중이고. 지금 대답해. 관측소에서 뭘 내리려 했어.”

한재록은 이를 악물었다.
“기록… 아니야…”

“그럼.”

“사람도 아니고…”

단휘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말 똑바로 해.”

한재록의 목이 한번 크게 울렸다.
그리고 그가 거의 속삭이듯 내뱉었다.

“시간을 고정한 잔류체.”

저장고 안 공기가 순간 식었다.

서진은 그 표현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섬뜩했다.

유란이 아주 느리게 되물었다.
“잔류체?”

“관측소 폐쇄 때… 다 못 지웠어…”
한재록이 숨을 몰아쉬었다.
“남은 걸… 옮기려고 했어… 중앙으로…”

단휘가 욕설을 삼켰다.
“미친.”

서진은 한 걸음 더 가까이 갔다.
“그게 뭐예요.”

한재록은 대답하려 했지만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통증이 다시 몰려온 듯 몸이 떨렸다. 유란이 그의 어깨를 눌러 진정시키며 말했다.
“짧게. 가장 중요한 것만.”

한재록은 시선을 위로 올렸다가, 다시 서진에게 내렸다.
“관측소는… 별을 보는 데가 아니었어.”

그 문장이 저장고 안에 떨어졌다.

아무도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한재록이 힘겹게 숨을 쉬며 계속 말했다.
“그리니치 협약 이후… 북부 관측소들은… 하늘이 아니라 인간 쪽 오차를 측정했어… 누가… 같은 시간에 못 붙는지… 어디서… 자꾸 밀려나는지…”

유란의 눈빛이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비조율자 관측소.”

“그 이상…”
한재록이 말했다.
“11관측소는… 남는 시간을 모았어…”

“남는 시간?”
서진이 거의 중얼거리듯 따라 했다.

“같은 시계에… 안 맞고… 밀려나서… 어딘가에 남는 것들…”
한재록은 말할수록 숨이 가빠졌다.
“사건에서 3초 앞서 도착한 죽음… 등록보다 7분 먼저 적힌 사망… 사람들이 못 본 장면이… 사라지지 않고 남는… 그런 것들…”

서진은 숨을 멈췄다.

7분 먼저 적힌 죽음.

어머니 기록에 있던 문장.
그 자신이 보아 온 장면들.
표준시와 현실 사이에서 밀려나 남아 버린 무엇.

한재록은 거의 고통스럽게 속삭였다.
“그걸… 관측하고… 모으고… 고정했어…”

단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남는 시간을 창고처럼 쌓아 뒀다고?”

“창고가 아니야…”
한재록이 말했다.
“봉인실… 관측실 아래에…”

유란이 물었다.
“왜 지금 옮기려 했지.”

“은종 사건 때문에…”
한재록의 눈빛이 다시 흔들렸다.
“누가… 열람 키를 꺼냈다고… 그래서… 11관측소도 위험하다고…”

셋의 시선이 동시에 서진의 회중시계 쪽으로 떨어졌다.

서진은 손안의 금속이 갑자기 더 무겁게 느껴졌다.

한재록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계… 어디서…”

“윤서가 남겼어요.”
서진이 말했다.

그 이름이 나오자, 한재록의 눈동자가 아주 작게 떨렸다.
“그 연구관…”

유란이 즉시 물었다.
“알고 있어?”

“직접은 아니고…”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기록상으론 그랬죠.”

한재록은 눈을 감았다 뜨며 힘겹게 말했다.
“11관측소… 폐쇄 직전… 윤서 이름이 한 번 올라왔어… 출입 승인 없는 이름인데…”

서진의 가슴이 조여 왔다.

어머니가 11관측소에 왔었다.

기록을 남긴 정도가 아니라, 직접 이곳에 출입했거나 출입하려 했다는 뜻이다.

유란이 물었다.
“언제.”

“정확한 시각은… 모르겠어… 기록이 두 번 겹쳐 있었으니까…”

두 번 겹쳐 있었다.

이 세계에선 그런 표현이 더 이상 비유가 아니었다.

단휘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럼 지금 관측소에 뭐가 남아 있지.”

한재록은 몇 초 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말했다.

“폐쇄된 관측실 하나. 봉인실 하나. 그리고… 아직 끝까지 멈추지 않은 관측 하나.”

“뭘 관측하는데.”

“표준시 이전의 인간.”

이번엔 서진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표준시 이전의 인간.

그건 어머니가 기록에 남긴 문장이기도 했다.
표준시 이전의 너를 잃지 마라.

그 말이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 관측 항목 혹은 분류명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유란도 그걸 이해한 듯 얼굴이 굳었다.
“관측소가 인간을 대상화한 거야.”

“원래부터…”
한재록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북부 관측소는… 하늘보다… 인간 쪽이었어…”

그 순간, 저장고 바깥에서 자갈 밟히는 소리가 났다.

단휘가 순식간에 몸을 돌렸다.
유란도 빛을 죽이고 입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둘.
아니, 셋.

멀지 않았다.

단휘가 거의 숨소리로 말했다.
“찾았다.”

유란이 바로 한재록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서진은 회중시계를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바깥에선 아주 낮게 금속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현장집행국 장비음이다.

단휘가 입구 쪽 바위 그림자 안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움직임이 너무 조용해서, 방금 전까지 거기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유란은 서진을 보며 손짓했다. 뒤쪽 벽면, 무너진 선반 아래 좁은 틈으로 숨으라는 뜻이었다.

서진이 움직이려던 순간, 주머니 속 회중시계가 다시 떨렸다.

틱.

한 번.

틱.

또 한 번.

그리고 이번엔 열지 않았는데도 장면이 밀려 들어왔다.

저장고 입구.
들어오는 집행자 둘.
바깥에 남아 있는 셋째.
그리고 단휘가 먼저 한 명을 제압한 뒤, 둘째가 유란 쪽으로 장비를 겨누는 장면.

아니다.
그보다 뒤.

더 안쪽.

한재록이 숨을 크게 들이쉬며 무언가를 말하려는 장면.
그 순간 집행자의 얼굴이 바뀐다.
놀람.
그리고 확신.

마치, 한재록의 한마디가 자신들을 숨기기보다 드러내 버리는 열쇠인 것처럼.

서진은 거의 반사적으로 유란의 팔을 잡았다.

유란이 눈빛으로 물었다.
뭐지.

서진은 아주 작게 입모양으로 말했다.
“재록 씨 말 못 하게 해야 해요.”

유란의 눈이 순간 좁아졌다.
그녀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신 바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미세하게 움직였다.

바깥 발소리가 입구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안쪽 확인해.”

낮고 균일한 공시청 집행자 목소리.

그 직후, 단휘가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왔다.

첫 번째 집행자의 목을 팔꿈치로 걸어 넘어뜨리고, 둘째의 손목을 비틀어 장비를 떨어뜨리는 데까지는 정말 한 박자도 걸리지 않았다. 불의 결 사용자는 빠른 게 아니라 먼저라고 했던가. 단휘의 움직임은 정확히 그랬다. 그는 상대가 행동하기 전에 이미 그 행동이 끝난 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셋째가 남아 있었다.

입구 바깥쪽에서 반응한 셋째 집행자가 즉시 안쪽을 향해 장비를 겨눴다. 금속 원판 중심에서 푸른 측정광이 켜졌다. 사람을 겨누는 빛이 아니라, 시간 반응을 고정하는 빛.

유란이 한재록의 입을 막은 채 고개를 숙였다.
서진은 순간적으로 알았다.
지금 자신이 시계를 열면, 저 푸른 측정광과 부딪혀 더 큰 흔들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때 한재록이 유란의 손 아래서 몸을 떨었다.
그는 아직 완전히 정신을 잃지 않았다.
무언가 말하려 했다.

안 돼.

서진은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한재록 쪽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눈 감아요!”

누구에게 한 말인지 자신도 몰랐다.

다음 순간, 셋째 집행자가 방아쇠를 당겼다.

푸른 측정광이 저장고 안을 스쳤다.
그러나 정확히 한재록이 아니라, 서진이 몸을 던진 위치와 회중시계가 닿은 금속 상자 쪽을 먼저 긁고 지나갔다.

세상이 뒤틀렸다.

아주 짧게.

서진은 입구 쪽 집행자의 얼굴을 두 개로 보았다.
하나는 지금의 얼굴.
다른 하나는 몇 초 뒤, 자신을 알아본 얼굴.

그리고 그 두 얼굴 사이에서 떠오른 한마디를 들었다.

“대상 확인—”

단휘가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셋째 집행자를 덮쳤다.

금속이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 짧은 신음, 누군가 숨을 끊듯 내뱉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몇 초 뒤 모든 것이 다시 조용해졌다.

서진은 바닥에 손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눈앞이 흐렸다.

유란이 가장 먼저 그를 붙잡았다.
“봤지.”

그녀의 목소리는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서진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뭘.”

“한재록 씨가 말하면… 들켰어요. 아니, 거의 들킬 뻔했어요.”

유란은 아주 짧게 눈을 감았다 뜨더니, 한재록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진정제 더 줘야겠어.”

한재록은 이미 반쯤 다시 정신을 잃고 있었다.

단휘가 입구 쪽에서 집행자들의 장비를 밖으로 걷어차며 말했다.
“지금부턴 여기 못 써.”

“당연하지.”
유란이 쏘아붙였다.

“좋아. 그럼 관측소로 바로 붙자.”

서진과 유란이 동시에 그를 봤다.

“지금?”
유란이 낮게 말했다.

“지금.”

“수색망 더 좁아질 텐데.”

“그래서 지금.”
단휘가 대꾸했다.
“한재록 말 들었잖아. 관측소에 남아 있는 게 ‘옮겨질’ 수도 있다고. 우리가 쉬는 동안 저쪽이 먼저 비워지면 끝이야.”

그 말은 맞았다. 너무 맞아서 불편할 정도로.

유란은 입술 안쪽을 한번 깨문 뒤, 결국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30분만. 재록 안정시키고, 장비 추리고, 바로 움직여.”

단휘는 더 반박하지 않았다.

서진은 벽에 기대 앉은 채 제11관측소 쪽이 있을 능선 위를 바라봤다. 방금까지 저장고 안에서 들은 말들이 아직 제대로 가라앉지 않았다.

관측소는 별을 보는 곳이 아니었다.
북부 관측소는 인간 쪽 오차를 측정했다.
남는 시간을 모았다.
표준시 이전의 인간을 관측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곳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이제 관측소는 더 이상 단순한 목적지가 아니었다.
자신이 왜 이렇게 시간을 보는지, 어머니가 무엇을 막으려 했는지, 공시청이 왜 자신을 “생체”로 회수하려 하는지, 그 모든 질문이 연결되는 장소였다.

멀리 능선 위로 해가 조금 더 올랐다.
그러나 그 빛조차 완전한 아침 같지는 않았다.

서진은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찾으러 가는 건 기록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을 보고 있던 시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시선이 제11관측소에 아직 남아 있다면,
이번엔 자신이 먼저 그곳을 보게 될 것이다.

아니면, 그곳이 먼저 자신을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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