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창작 소설] 그리니치 오차: 표준시 이전의 너 - 1장 은종의 새벽
1장
은종의 새벽
은종에서는 새벽이 두 번 왔다.
사람들이 믿는 새벽이 먼저 오고,
하늘이 실제로 밝아지는 새벽이 나중에 왔다.
도시 전체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을 때도, 중앙 종탑에 매달린 공시등은 어김없이 푸른 빛을 토해냈다. 그 빛이 세 번 점멸하면, 모든 집의 시계는 동시에 같은 분을 가리켰고, 사람들은 그제야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빵집의 굴뚝에 연기가 오르고, 제분소 수차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학교 기숙사의 아이들이 졸린 눈을 문지르며 세면장으로 몰려가는 시각. 그러나 그 순간에도 동쪽 능선 위의 하늘은 검푸른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누구도 창문을 열어 밖을 확인하지 않았다.
은종의 사람들은 날씨를 살필 때조차 먼저 시계를 보았다. 종탑이 새벽이라 하면 새벽이었고, 공시등이 아침을 허락하면 아침이었다. 빛은 그 다음 문제였다.
서진은 늘 그 틈에서 깨어 있었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천장을 보지 않고, 방문 아래로 들어오는 어둠의 결부터 살폈다. 아직은 밤의 결이 더 짙었다. 벽에 걸린 낡은 시계는 새벽 오 시 삼 분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방 안 공기는 자정 직후처럼 무거웠고, 창틀 위에 맺힌 습기는 해 뜨기 직전의 차가움보다 훨씬 깊었다. 이 정도면 오늘도 공시가 하늘보다 서두른다는 뜻이었다.
서진은 침상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 순간, 귀 뒤쪽이 아주 잠깐 저릿했다.
또 시작인가.
그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다행히 이번에는 심한 쏠림은 없었다. 가끔씩 공시등이 켜진 직후에는 방 안의 모든 것이 자기 자리를 잃은 것처럼 어긋나 보일 때가 있었다. 세면대가 반 발자국쯤 왼쪽으로 밀려 있거나, 문고리가 닫힌 문 바깥쪽에 달려 있거나, 아직 읽지 않은 책의 마지막 장면이 눈앞에 먼저 번져 오거나. 그런 날은 종일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는 그런 증상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해 봐야 병원 권고서만 돌아온다. 공시 적응 불균형, 경미한 조율 스트레스, 청소년기 환각성 편두통. 도시 의원이 아무렇지 않게 읊는 병명들은 언제나 길었고, 설명은 짧았다. 더 자주 시계를 보라, 공시 종에 맞춰 식사하라, 잠들기 전 개인용 휴대시계를 손목에 차라. 서진에게는 그 모든 처방이 고문과 비슷했다.
그는 벽시계 쪽으로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시계를 가까이 만지면 맥박이 비정상적으로 빨라진다. 대신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빛 하나 없는 새벽 거리 위로, 이웃집 창마다 같은 모양의 둥근 그림자가 떠 있었다. 배급 시계였다. 경도제국식 표준 규격을 본떠 시란제국 공시청이 전국에 나눠 준 금속 테두리 시계. 중앙의 분침은 길고 얇았으며, 시침과 초침에는 각각 제국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장 정확한 것”이라 불렀다.
서진은 그것이 가장 차가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종탑에서 첫 번째 시험 타종이 울렸다.
쿵.
쇳소리가 아니라, 물속에서 둔탁한 돌을 떨어뜨린 것 같은 울림이었다. 은종의 새벽 종은 늘 그렇게 들렸다. 소리가 퍼져 나간다기보다 도시 전체를 안쪽에서 한 번 움켜쥐었다 놓는 듯한 울림. 쿵, 하는 그 한 번의 음이 골목, 지붕, 창턱, 우물, 굴뚝, 사람의 뼈 안쪽까지 골고루 스며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서진은 창 너머 광장 한복판에서 누군가가 넘어지는 것을 보았다.
실제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분명 한 사내가 보였다. 회색 외투를 입고, 오른쪽 다리를 약간 저는 사람. 그 사내는 종탑 아래를 급히 가로지르다 왼쪽 어깨를 움켜쥐고 무릎을 꺾었다. 검붉은 것이 돌바닥에 튀었다. 사내는 고개를 들었고, 마치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것처럼 허공 위쪽을 향해 입을 벌렸다.
그리고 사라졌다.
창밖에는 다시 아무도 없었다.
서진의 손끝이 굳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 것이 내려갔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선명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또 봤니?”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진은 몸을 굳혔다.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아니요.”
문이 반쯤 열리며 할머니가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허리가 조금 굽은 작은 체구였지만, 눈빛만큼은 젊은 사람보다 더 날카로웠다. 한 손에는 양철 물주전자를 들고 있었고, 다른 손엔 손바닥만 한 주머니시계를 쥐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방에 들어서기 전에 먼저 자기 시계를 확인했다.
“종 울리기 전에 깨어 있으면 좋을 게 없다.”
“잠이 깼을 뿐이에요.”
“그 ‘뿐’이 문제지.”
할머니는 방 안으로 들어와 물주전자를 난로 옆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시선이 잠깐 창문으로 향했다가 곧 서진에게 돌아왔다. 마치 창밖 어둠 속에 무엇이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오늘은 외출하지 마라.”
“왜요?”
“광장 쪽 분위기가 좋지 않다.”
“아직 아무도 안 나왔는데요.”
“그래서 더 그렇지.”
그 말은 은종 노인들이 가끔 쓰는 이상한 방식이었다. 너무 조용할 때 더 위험하다는 뜻일 수도 있었고, 아직 오지 않은 일을 이미 낌새로 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서진은 더 묻지 않았다. 할머니는 간섭이 많은 편이었지만, 근거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난로에 불을 지피고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공시등 보고 바로 일어나지 말고, 해가 산등성이에 걸릴 때까지는 창문도 오래 보지 마. 네 어머니도 늘 그 말을 했어.”
서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면 집 안 공기가 미세하게 바뀐다. 마치 벽장 깊은 곳에 오래 넣어 둔 찬 공기가 문틈으로 새는 것처럼. 어머니가 죽은 지 벌써 여섯 해가 지났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죽었다”는 표현 대신 “사라졌다”는 식의 애매한 말을 썼다. 실험실 사고라고도 했고, 공시청 기록실 화재라고도 했고, 나중에는 그냥 입을 닫아 버렸다. 서진은 그날 이후로 타인의 침묵을 믿지 않게 됐다.
두 번째 종이 울렸다.
쿵.
이번에는 창문 유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서진은 무의식적으로 광장 쪽을 다시 보았다.
아무도 없다.
그래야 맞다.
하지만 방금 전에 그가 본 사내는 너무 분명했다.
회색 외투. 오른쪽 다리의 미세한 절뚝임. 왼쪽 어깨를 움켜쥔 손. 돌바닥 위로 튄 검은 피.
서진은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구분하려 애썼다. 그것이 이미 일어난 일의 흔적인지, 곧 일어날 일의 틈인지, 아니면 공시등 아래에서만 생기는 자기 두통의 부산물인지. 문제는 언제나 마지막이었다.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확인할 즈음이면 대개 늦었다.
“듣고 있니?”
“네.”
“오늘 장터엔 가지 마라.”
“왜 다들 광장 쪽 얘기만 해요?”
할머니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뜻밖에도 대답했다.
“새벽 전에 검은 새가 종탑을 세 번 돌았어.”
서진은 눈을 깜빡였다.
“그걸 믿으세요?”
“시계만 믿는 것보단 낫지.”
그 말은 거의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하지만 서진은 분명히 들었다.
할머니는 더 말하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자, 다시 조용해졌다. 난로에 붙은 불씨가 마른 장작을 깨물 듯 타닥거렸고, 방 안에는 젖은 나무 냄새와 묵은 먼지 냄새가 섞여 번졌다.
서진은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동이를 옮기는 소리,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아직 덜 깬 아이의 울음, 누군가 기침을 삼키는 소리. 도시는 공시에 맞춰 아주 천천히 살아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가 아는 은종의 진짜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는 침상 밑에서 작업용 바지를 꺼내 입고, 상의를 걸친 뒤 부엌으로 나갔다. 집은 오래된 목조 건물이었다. 복도 끝에는 어머니 방으로 쓰이던 작은 방이 하나 있었는데, 사고 이후로는 거의 창고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청소만 할 뿐, 안의 물건을 치우지 않았다. 서진도 일부러 들여다보지 않으려 했다. 닫힌 문 하나쯤은 집 안에 있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아침은, 이상하게도 그 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주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서진은 멈춰 섰다.
어제 밤에는 분명 닫혀 있었다. 그는 잘 기억했다. 물통을 옮기다 방문턱에 발을 걸려 짜증을 냈고, 그때 손등으로 문을 밀어 완전히 닫았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종이 한 장 들어갈 만큼의 틈이 생겨 있었다. 그 틈에서 먼지 냄새 말고 다른 것이 흘러나왔다.
기름 냄새.
아주 오래된 금속에 밴 차가운 냄새.
서진은 천천히 문에 다가갔다.
등 뒤에서 세 번째 종이 울리려는 기척이 느껴졌다.
문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방 안은 어두웠다. 창문엔 천이 덮여 있었고, 책상 위 윤곽만 희미하게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무언가가 바뀌었다는 걸 단번에 알았다. 어젯밤과 지금의 방은 분명 같은 방이 아니었다. 아니, 같은 위치에 있지만 다른 시간의 결이 얹혀 있는 것 같았다. 어제는 없던 금속성 냄새가 났고,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만 맡을 수 있었던 희미한 잉크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문을 밀었다.
끼익.
문이 열리자마자, 세 번째 종이 울렸다.
쿵.
동시에 방 안 어딘가에서 작은 기계음이 났다.
딱.
서진의 심장이 한순간 멎는 듯했다.
소리는 책상 아래에서 났다. 그는 숨을 죽인 채 한 걸음 들어섰다. 방 안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책상 다리 옆 바닥판이 아주 조금 들려 있었다. 누군가 안에서 밀어 올린 것처럼. 서진은 무릎을 굽혀 손가락을 틈에 넣었다. 나무판은 의외로 쉽게 들렸다.
그 아래에는 얕은 빈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손바닥만 한 은빛 회중시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서진은 한동안 그것을 집어 들지 못했다.
시계의 표면은 오래된 은처럼 흐릿했고, 뚜껑 가장자리에는 미세한 별 문양이 둘러져 있었다. 시곗줄은 없었고, 케이스 한쪽엔 검게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누가 보아도 오래전에 숨겨 둔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먼지가 거의 쌓여 있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 손에 쥐고 있다 내려놓은 것처럼.
뒤쪽에서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할머니가 부엌에서 움직이는 소리였다.
서진은 반사적으로 회중시계를 움켜쥐었다.
차갑다.
아니, 차갑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마치 금속 안쪽이 아직 밤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세상이 아주 짧게 흔들렸다.
방 안의 어둠이 한 겹 벗겨졌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책상 위엔 없던 종이 더미가 잠깐 보였다.
창문 틈으로는 지금보다 훨씬 강한 햇빛이 한 줄기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누군가 숨을 죽인 채 흐느끼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 분명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진.”
그는 손에서 시계를 놓칠 뻔했다.
순간 그의 눈앞에 방이 세 개로 갈라졌다.
하나는 지금의 방이었다. 비어 있고, 닫혀 있고, 오래된 냄새만 남은 방.
하나는 누군가 급히 서랍을 뒤지고 있는 방이었다. 책이 쏟아져 있고, 바닥엔 찢긴 서류가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창문이 활짝 열린 채 바깥에서 붉은 빛이 밀려들어 오는 방이었다. 그 방의 한가운데에 어머니가 서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제대로 보여 주지 않은 채, 책상 아래를 향해 몸을 굽히고 있었다. 지금 서진이 손에 쥔 바로 그 시계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서진은 숨을 들이켰다.
세 장면은 눈 깜짝할 사이에 포개졌다가 무너졌다. 그의 무릎이 휘청였고, 목 안쪽으로 쓴 물이 치밀었다. 귀 뒤쪽에서 시작된 저릿함이 관자놀이를 관통하듯 퍼졌다.
그리고 동시에, 창밖 광장에서 사람들 비명이 터졌다.
서진은 고개를 들었다.
아까 그가 본 바로 그 사내가, 종탑 아래 돌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회색 외투.
오른쪽 다리의 절뚝임.
왼쪽 어깨를 움켜쥔 손.
돌바닥 위로 튄 검붉은 피.
이번에는 환영이 아니었다.
잠깐 정적이 흐른 뒤, 광장의 공기가 폭발하듯 흔들렸다. 누군가 “사람이 쓰러졌다!”고 외쳤고, 누군가는 공시청을 부르라고 소리쳤다. 빵집에서 뛰어나온 여자가 비명을 질렀고, 맞은편 골목 어귀에선 문들이 연달아 열렸다. 그 순간, 종탑 위 공시등이 한 번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은종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시 전체의 시계가 동시에 멈칫했다.
정확히 한 초.
벽 너머에서 할머니가 서진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손안의 회중시계가 갑자기 살아 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분명 멈춰 있는 시계였는데도, 뚜껑 안쪽에서 아주 낮은 진동음이 올라왔다.
틱.
한 번.
틱.
또 한 번.
서진은 거의 본능적으로 시계 뚜껑을 열었다.
안쪽에는 일반적인 숫자 대신, 낯선 눈금과 함께 아주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표준시 이전의 너를 잃지 마라.”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광장 쪽에서 군화 소리가 울렸다.
공시청 집행자들이었다.
광장 쪽 비명은 한 번에 번지지 않았다.
처음엔 한 사람의 날카로운 숨 들이마심이었고,
다음엔 그걸 본 사람의 짧은 욕설이었고,
그 다음엔 문턱을 넘어 나온 이웃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늦게 터뜨리는 공포였다.
그러나 군화 소리는 달랐다.
그것은 언제나 너무 빨랐다.
사건이 벌어진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건보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서진은 손안의 회중시계를 꽉 쥐었다.
차갑던 금속이 이제는 묘하게 미지근했다. 살아 있는 체온이 옮겨붙은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금속 안에서 아주 오래된 온도가 천천히 깨어나는 것 같기도 했다.
“서진!”
할머니가 복도 끝에서 다시 그를 불렀다. 이번엔 낮게, 그러나 이전보다 분명하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부엌 쪽에서 문간까지 나와 있었고, 광장 쪽 소리를 듣고도 창밖을 보지 않았다. 그 대신 서진의 손을 먼저 봤다. 그리고 그의 손안에 들린 회중시계를 본 순간, 얼굴빛이 하얗게 바뀌었다.
“그걸 어디서 찾았니.”
물음이 아니라 거의 확인이었다.
서진은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얼굴에서 놀람보다 먼저 읽힌 건 공포였다. 단순히 숨겨 둔 유품이 들킨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저 시계를 알고 있었다. 아니, 저 시계가 여기 있는 사실 자체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의 표정이었다.
“어머니 방 바닥 밑에서요.”
“지금 당장 닫아.”
“뭐요?”
“시계 뚜껑. 닫으라고.”
서진은 그제야 손안의 시계를 내려다봤다. 뚜껑은 반쯤 열린 채였다. 안쪽의 낯선 눈금은 여전히 읽기 어려운 각도로 번들거렸고, 조금 전 본 문장은 벌써 어둠 속에 스며들 듯 희미해지고 있었다.
“표준시 이전의 너를 잃지 마라.”
그 문장을 다시 떠올린 순간, 귀 뒤에서 시작된 저릿함이 이번에는 목덜미까지 번졌다. 동시에 광장 쪽에서 짧고 금속성인 휘슬 소리가 세 번 울렸다.
공시청 현장 봉쇄 신호였다.
할머니가 성큼 다가와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지금부터는 내 말만 들어라. 시계는 주머니에 넣고, 아무 말도 하지 마. 누가 뭘 물어도 광장은 못 봤다고 해.”
“저 사람, 제가 먼저 봤어요.”
“그걸 입 밖에 내면 넌 오늘로 끝이다.”
서진은 할머니를 바라봤다.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은 차갑고도 단단했다. 평생 장작을 패고 물동이를 나르며 굳어진 손. 그런데 지금은 힘줄 하나하나가 공포로 당겨져 있었다.
문밖 거리에서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집행자다.”
“공시청에서 벌써 왔어?”
“누가 신고했나?”
“아니, 종이 울리자마자 들어왔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쾅. 쾅. 쾅.
“시란제국 공시청 집행국이다. 전원 문을 열고 공시 확인에 응하라.”
낮고 균일한 목소리였다. 인간의 목에서 나왔는데도 기계의 반복음처럼 들렸다.
서진은 등줄기가 굳는 걸 느꼈다. 할머니는 재빨리 그의 손을 놓고 눈짓했다. 방으로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현장 봉쇄에서는 집집마다 인원을 확인하고, 새벽 공시 직후의 위치와 상태를 묻고, 필요하면 손목시계 착용 여부까지 검사한다.
특히, 공시등이 한 번이라도 꺼진 날이라면.
할머니가 먼저 대문 쪽으로 향했다. 서진은 회중시계를 바지 안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고 숨을 골랐다. 심장은 아직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공포보다 먼저 올라오는 감정은 다른 쪽이었다.
왜 하필 지금이었을까.
왜 어머니 방이 열려 있었을까.
왜 이 시계를 쥔 순간, 광장에서 자신이 본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왜 공시청은 항상 사건보다 빨리 도착하는가.
대문이 열리자 금속장식이 부딪히는 낮은 소리가 났다. 문틈으로 들어온 것은 차가운 아침 공기가 아니라 기름, 가죽, 젖은 금속 냄새였다. 군복 냄새였다.
“가구원 수는.”
“둘이다.”
“출생 등록명.”
“강매옥. 강서진.”
“손목을 보여라.”
서진은 복도 끝에서 멈췄다. 집행자의 그림자가 마룻바닥 위로 길게 들어왔다. 그림자가 이상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 문밖의 그림자는 마치 오후 햇빛 아래 드리운 것처럼 지나치게 또렷하고 길었다. 그 순간 그는 또 알았다. 오늘 은종의 시간은 단순히 한 초 흔들린 게 아니다. 무언가가 더 크게 어긋나고 있다.
“소년도 앞으로.”
명령이 떨어졌다.
서진은 천천히 복도로 걸어 나갔다. 현관 앞에는 집행자 둘이 서 있었다. 둘 다 회색 제복 위에 검은 금속 장비대를 걸치고 있었고, 가슴에는 시란제국 공시청 집행국의 표식인 세 겹의 원형 문양이 박혀 있었다. 한 명은 철의 기운 특유의 딱딱하게 굳은 인상을 가진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유난히 피부색이 옅어 물의 기운 계열에서 흔히 보이는 서늘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서진이 나타나자, 물빛 피부의 집행자가 그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기상 시각은.”
“잘 모르겠습니다.”
“공시등 전이냐 후냐.”
“후입니다.”
“광장의 소요를 목격했나.”
“아니요.”
거짓말은 비교적 쉽게 나왔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물의 기운을 가진 집행자는 사람의 말보다 흔적을 읽는다. 지금 막 본 장면이 서진의 눈에 얼마나 선명하게 남아 있는지, 그 집행자가 알아챌 가능성은 충분했다.
집행자는 한 걸음 다가왔다.
“손.”
서진은 잠시 멈췄다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은 멀쩡했다. 그러나 문제는 손끝에 남은 미세한 떨림이었다. 집행자의 시선이 손끝에서 손목, 손목에서 주머니 쪽으로 아주 짧게 미끄러졌다. 그 짧은 움직임만으로도 서진은 들켰다는 감각을 느꼈다.
그때였다.
광장 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또 한 명입니다!”
순식간에 두 집행자의 시선이 동시에 밖으로 꺾였다. 철의 기운을 가진 집행자가 욕설처럼 짧게 숨을 뱉었다. 현장에 두 번째 피해자가 나왔다는 뜻이었다. 물빛 피부의 집행자는 서진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뒤쪽 동료에게 말했다.
“이 집은 보류. 시계 반응 검사만 먼저.”
철의 집행자가 허리춤에서 작은 원판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검은 금속판이었는데, 중앙에는 아주 가는 초침 같은 바늘이 박혀 있었다. 공시 적응 측정기. 학교에서도 문제 학생들에게 간혹 들이대는 물건이었다. 표준시에 대한 신체 반응, 맥박 동조율, 시간 불응 징후 같은 걸 본다고 들었다.
서진은 무심한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다.
“손목.”
철의 집행자가 말했다.
그가 왼손을 내밀자, 측정기의 바늘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집행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오차 범위 내.”
다행이라고 생각한 순간, 물빛 피부의 집행자가 낮게 물었다.
“오른손은?”
서진의 심장이 한 번 턱 걸렸다.
오른손.
회중시계를 쥐었던 손.
아직도 금속의 감각이 아주 옅게 남아 있는 손.
“왜요?”
“묻지 말고 내밀어.”
할머니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애가 어릴 때 손목을 다쳐서 오른쪽 맥이 고르지 않습니다.”
“기록엔 없습니다.”
“시골 의원이 그걸 일일이 중앙에 올리겠습니까.”
할머니의 목소리는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서진조차 잠시 믿을 뻔했다. 그러나 물빛 집행자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서진의 오른팔을 직접 잡으려 했다.
그 순간, 바지 안주머니 속 회중시계가 다시 떨렸다.
틱.
아주 작았지만, 서진은 분명히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눈앞에 집행자의 손이 두 개로 갈라져 보였다. 하나는 지금처럼 자기 손목을 향해 오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이미 몇 초 뒤의 위치에서 그의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그 두 장면이 순간적으로 겹쳤다. 서진은 생각보다 먼저 몸을 틀었다.
집행자의 손이 허공을 쳤다.
정적이 흘렀다.
너무 빨랐다.
공시 기준으로 반 박자 이상 빨랐다.
철의 집행자가 즉시 자세를 낮췄다. 손이 장비대의 봉인봉으로 향했다. 물빛 집행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방금 전까지 무표정하던 얼굴에서 처음으로 명확한 경계가 드러났다.
“다시.”
그가 말했다.
“뭘 피한 거지?”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밖에서 들려오는 종탑의 떨림을 들었다. 본래라면 세 번째 타종 이후 잠잠해져야 할 금속 울림이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아주 낮고, 길고, 사람 귀로는 간신히 인식될 만큼 가느다란 진동. 마치 종탑 깊은 내부에서 다른 시각의 종이 늦게 따라 울리는 것처럼.
집행자의 시선이 완전히 바뀌었다.
“소년을 데려간다.”
할머니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무슨 근거로?”
“공시 불응 반응, 회피 행동, 현장 인접 위치, 그리고—”
물빛 집행자는 말을 멈췄다. 그가 서진의 얼굴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서진의 눈을.
서진도 알았다. 또 보이기 시작했다.
집행자의 왼쪽 관자놀이 근처에, 아주 얇고 검은 균열 같은 것이 어른거렸다. 그것은 피부의 상처가 아니었다. 사람이 사람을 오래 추적하고, 오래 침묵시키고, 오래 같은 시간에 복종할수록 생기는 일종의 경직된 결처럼 보였다. 그는 이전에도 몇몇 노인과 병자들 주위에서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선명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균열 뒤쪽으로, 아주 잠깐 다른 장면이 번졌다.
검은 복도.
닫힌 철문.
누군가의 이름이 반복해서 지워진 문서.
그리고 같은 목소리.
“무결인은 출생하지 않는다. 오직 기록 오류만 존재한다.”
서진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너.”
물빛 집행자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그것은 놀람이라기보다, 오래 찾던 것을 눈앞에서 알아본 사람의 표정이었다.
“넌 지금 뭘 본 거지?”
그 질문이 떨어지는 순간, 광장 쪽에서 또 한 번 비명이 터졌다. 이번에는 훨씬 컸다. 이어서 누군가가 “시계가 멈췄다!”고 외쳤다. 현관 밖 이웃들이 동시에 웅성거렸다. 집행자 둘도 본능적으로 뒤를 돌렸다.
마을 전체의 시계가 멈췄다는 말은, 공시청 입장에서는 살인 사건보다 더 큰 문제였다.
찰나의 틈이었다.
할머니가 서진의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뒷문.”
그 한마디에 서진은 더 생각하지 않았다.
둘은 거의 동시에 복도를 돌아 부엌으로 뛰었다. 뒤에서 집행자의 고함이 들렸고, 현관문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할머니는 부엌 바닥의 낡은 깔개를 발로 걷어내고, 아래쪽 덧문을 열었다. 석탄을 넣어 두던 오래된 저장 구멍이었지만, 몇 해 전부터는 비워 둔 공간이었다.
“들어가서 뒷골목 배수로로 나가. 종탑 쪽은 보지 말고, 물길 따라 북쪽 제분소까지 뛰어.”
“할머니는요?”
“나는 늙어서 느리다.”
“같이 가요.”
“서진.”
그녀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짧은 순간, 그녀의 얼굴은 처음으로 아주 선명한 슬픔을 드러냈다.
“네 어머니도 끝까지 같은 말만 했어. 같이 가자고. 그런데 어떤 시간은 같이 나갈 수가 없다.”
서진은 숨이 막혔다.
“시계는 절대 버리지 마. 그리고 누가 널 부르더라도, 오늘 들은 네 이름 말고 다른 이름으로 대답하지 마.”
“무슨—”
뒷마당 쪽 창문이 깨졌다.
집행자들이 우회해 들어온 것이다.
할머니가 그를 거의 밀어 넣듯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서진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작은 체구, 굽은 허리, 그러나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눈빛. 그녀는 덧문을 닫기 직전, 아주 낮게 말했다.
“네가 먼저 본 시간은, 언젠가 네가 되돌려야 할 시간이다.”
덧문이 닫혔다.
바깥 소리가 흙과 나무판 너머로 둔하게 들려왔다. 고함, 가구 넘어지는 소리, 누군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 그리고 아주 잠깐,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아듣지 못했다. 서진은 이를 악물고 몸을 웅크린 채 좁은 통로를 기어 나갔다.
회중시계는 여전히 주머니 속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배수로 출구로 나왔을 때, 은종의 진짜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도시 전체의 시계는 모두 멈춰 있었다.
종탑 위 공시등이 푸른빛 대신 검은 불꽃처럼 흔들리고,
골목마다 사람들은 자기 손목과 벽시계를 번갈아 보며 서 있었고,
아무도 감히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했다.
서진은 제분소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의 뒤에서, 종탑의 종이 네 번째로 울렸다.
은종에서는 절대 울리지 않아야 할 횟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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