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창작 소설] 그리니치 오차: 표준시 이전의 너 - 16장 등록되지 못한 이름들
16장
등록되지 못한 이름들
밤은 깊어졌지만, 그 집 안의 시계들은 한 칸도 움직이지 않았다.
바깥 마을은 아주 늦은 숨소리처럼 조용했다. 물길 위로 바람이 얇게 지나가고, 멀리서 나무문이 닫히는 소리가 한 번 들린 뒤로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 정적은 공시청 건물이나 관측소의 그것과 달랐다. 거기엔 숨기고, 버티고, 무너지지 않으려는 생활의 온도가 남아 있었다.
노파는 한재록에게 약을 먹이고, 다리에 새로 약포를 감아 준 뒤에야 벽 쪽 작은 자리에 등을 붙였다. 유란은 여전히 깨어 있었고, 단휘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자는 건 아니었다. 민도혁은 문 가까운 자리에 앉아 바깥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서진 앞엔, 윤서가 맡기고 갔다던 상자가 놓여 있었다.
“읽을 거면 지금 읽어.”
노파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새벽 가까워지면 오히려 더 안 좋아.”
서진은 상자 위에 손을 올렸다.
나무는 오래됐지만 매끈했다. 여러 번 열리고 닫힌 흔적이 있는 상자였다. 누군가가 이걸 단순히 숨겨 둔 게 아니라, 정말로 “언젠가 보여 주기 위해” 맡겨 둔 물건이라는 게 손끝으로 느껴졌다.
유란이 조용히 말했다.
“같이 볼게요.”
단휘도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나도.”
서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자를 열자 맨 위에 놓인 종이 꾸러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첫 장 제목은 아까 본 그대로였다.
“등록되지 못한 이름들의 임시 목록”
이번엔 서진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첫 장을 넘겼다.
안쪽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복잡한 보고서도, 공시청 문서 같은 양식도 아니었다. 손으로 일일이 적은 이름과 날짜, 두 개의 시각, 그리고 짧은 메모가 반복되는 형식이었다.
첫 번째 이름.
“하린 — 공식 출생 04:12 / 집안 시각 새벽 끝물 / 8세 때 공시 불응 증상 / 장부상 사망, 실제 생존 3년”
두 번째 이름.
“문철 — 공식 사망 17:30 / 실제 단절 17:37 / 장례 전 흔적 잔류 / 가족 이탈”
세 번째 이름.
“연수 — 출생 미등록 / 집안 시각만 존재 / 철 결 판정 실패 / 북동 마을 이동”
서진의 눈이 천천히 굳었다.
유란도 같은 지점에서 숨을 멈췄다.
이건 단순한 피난민 명단이 아니다.
공식 시간과 실제 시간 사이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목록이다.
누군가는 태어나고도 등록되지 못했고, 누군가는 죽기 전에 죽은 것으로 적혔고, 누군가는 판정에 실패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단휘가 낮게 말했다.
“전부 이런 식이야?”
“봐야죠.”
유란이 대답했다.
장수가 넘어갈수록 패턴은 더 분명해졌다.
- 공식 시각과 집안 시각이 다름
- 출생 혹은 사망이 먼저 기록됨
- 기운 판정 불일치
- 공시 적응 실패
- 장부상 실종, 실제 이동
- 기록 없음, 흔적만 존재
그리고 아주 드물게, 같은 표시가 반복됐다.
“분류 보류”
“무결 의심”
“질문 잔류”
“반복 관측 금지”
서진은 그 문장들을 읽을수록 점점 숨이 가빠지는 걸 느꼈다.
자신 같은 사람이 하나도 아닐 거라 예상 못 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이름이, 이렇게 오래, 이렇게 조용히 장부 바깥에 쌓여 있었다는 건 다른 문제였다.
공시청은 실패를 숨긴 것이 아니라, 실패를 축적해 왔던 것이다.
유란이 조심스럽게 다음 장을 넘기다가 멈췄다.
“이거…”
서진이 그녀가 짚은 줄을 봤다.
“윤해 — 공식 사망 21:00 / 실제 단절 21:07 / 보정 승인 확인 / 직계 보호 대상 분산”
집 안 공기가 멎은 듯했다.
단휘가 바로 물었다.
“뭐지.”
유란은 천천히 읽었다.
“공식 사망 21:00. 실제 단절 21:07.”
서진은 종이를 손에서 놓칠 뻔했다.
윤해.
윤서가 아니다.
하지만 윤씨이고, 사망 시각 보정 방식이 완전히 같다.
“직계 보호 대상 분산…”
유란이 아주 낮게 되뇌었다.
민도혁도 몸을 일으켜 가까이 왔다.
노파 역시 눈을 뜨고 그 줄을 봤다.
“그 여자가 이 장을 오래 들고 있었어.”
노파가 말했다.
“읽을 때마다 손이 떨리더라.”
서진은 목이 막히는 걸 느꼈다.
“윤해가 누구죠.”
노파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말했다.
“직접은 못 들었어. 근데 혈육 같았지.”
유란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가족일 수도 있어요. 형제나 부모 쪽.”
문철, 연수, 하린 같은 이름들 사이에서 이 이름 하나만 유난히 묵직했다.
윤서의 죽음이 단일 사건이 아니라, 이미 같은 방식으로 누군가가 “7분 먼저” 지워진 이력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윤서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단휘가 낮게 말했다.
“윤서도 처음 당한 게 아니었네.”
“네.”
유란이 대답했다.
“이미 같은 방식으로 누군가 잃었고, 그다음 차례가 된 거죠.”
서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7분은 이제 제도가 사람을 처리하는 방법일 뿐 아니라, 윤서에게는 개인적인 시작점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먼저 잃은 방식. 어쩌면 그래서 끝까지 그 숫자를 쫓았는지도 모른다.
서류 더미 아래쪽으로 갈수록, 목록은 더 정리되지 않은 형태로 바뀌었다. 이름만 남고 시각이 비어 있는 줄, 메모만 있고 공식 기록이 없는 줄, 어떤 경우엔 이름 대신 별표 하나만 적힌 줄도 있었다.
그중 몇 장은 윤서의 글씨가 아니라 다른 필체로 덧대어져 있었다. 노파나 이 마을 사람이 추가 기록을 이어 쓴 흔적 같았다.
“여기.”
유란이 또 한 장을 짚었다.
“‘두 개의 출생 시각 중 늦은 쪽으로 등록된 아이는 질문 잔류 빈도가 높음.’”
단휘가 인상을 찌푸렸다.
“질문 잔류가 뭐지.”
노파가 대답했다.
“자꾸 자기가 본 걸 묻는 애들.”
“무슨 말이죠.”
“죽은 사람이 아직 안 죽었다고 하거나, 일어나지 않은 걸 봤다고 하거나, 누가 자기 이름을 먼저 부르기 전에 이미 알았다고 하거나.”
노파가 말했다.
“그런 애들은 말보다 질문을 더 오래 붙잡고 살아.”
서진은 윤서의 음성을 떠올렸다.
기록보다 먼저 죽으면, 남는 건 시간이 아니라 질문이다.
그 문장이 이제 조금 더 현실적인 형태를 얻었다.
질문은 철학이 아니라 증상이고, 흔적이고, 살아남은 사람에게 남는 감각이었다.
민도혁이 목록 뒤쪽 장 하나를 넘기다 조용히 말했다.
“이건 봐야겠네.”
그가 짚은 줄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도윤 — 기준점 방문 후 기록 전환 / 현장 인원 D코드 확인 / 이후 행방 미상”
유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D코드.”
단휘가 말했다.
“또 도씨냐.”
“꼭 그렇진 않겠지만…”
유란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D-0랑 완전히 무관하다고 하긴 어렵죠.”
서진은 이제 더 이상 도해율을 “지금 쫓아오는 공시청 인물”로만 볼 수 없었다. 그 이름 뒤에 붙은 코드와 자리, 그리고 이 목록 속 D코드 흔적들은, 이 시스템이 한 사람의 악의가 아니라 오랫동안 계승된 기준점 관리의 구조라는 걸 점점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노파가 손을 내밀었다.
“뒤 장 넘겨 봐.”
서진이 마지막 몇 장을 넘기자, 안쪽엔 목록이라기보다 짧은 부록 같은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제목은 없고, 윤서의 글씨로 적힌 짧은 문장들만 있었다.
“같은 방식으로 먼저 죽은 이름이 하나가 아니라는 걸 확인함.
공식 오차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실제론 반복 구조.
도해율이 사람인지 자리인지 아직 단정할 수 없음.
다만 D-0는 ‘검토’가 아니라 ‘기준 유지’에 더 가까움.
서진이 이 기록을 본다면, 이미 내가 원하던 것보다 더 많이 늦은 뒤일 가능성이 높다.”
서진은 그 마지막 문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원하던 것보다 더 많이 늦은 뒤.
윤서는 이 목록이 언젠가 서진에게 가는 걸 바랐지만, 그 시점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자신이 이걸 보고 있다는 건, 이미 그녀가 예상한 “안 좋은 경우” 쪽에 가깝다는 뜻일 수도 있다.
유란도 그 줄을 읽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남겼네요.”
“포기 안 했다는 뜻이겠지.”
민도혁이 말했다.
단휘가 물었다.
“결국 이 목록으로 뭘 할 수 있지.”
그건 가장 현실적인 질문이었다.
서진도 그걸 생각하고 있었다.
이 목록은 중요하다. 무섭고, 결정적이고, 구조적인 반복을 증명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당장 뭘 할 수 있을까.
유란이 먼저 답했다.
“세 가지.”
집 안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첫째, 윤서 사건이 단일 사고가 아니라는 증거예요.
둘째, 기준 밖 사람들의 이동 경로와 생존 방식이 일부 남아 있어요.
셋째…”
그녀가 잠깐 말을 고르고 서진을 봤다.
“서진 같은 사례가 ‘처음’이 아니라는 걸 확인해 줘요. 최소한 의심 단계까지 포함해서.”
단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좋아. 그럼 우린 혼자가 아니라는 거네.”
노파가 그 말을 조용히 받았다.
“혼자가 아니라고 해서 쉬워지는 건 아니야.”
“알아요.”
서진이 처음으로 끼어들었다.
“근데 다르긴 해요.”
그건 분명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이 체계의 오류이거나 예외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 목록은 말해 준다.
예외는 한 번이 아니라 반복되었고, 반복되는 예외는 더 이상 우연이라고 부를 수 없다.
어쩌면 무결인은 “희귀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속 지워져 왔기 때문에 드물게만 남은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그때, 바깥에서 짧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민도혁이 즉시 몸을 일으켰다.
“우리 쪽 신호 아니야.”
단휘도 바로 일어났다.
노파는 화로의 불씨를 손으로 덮듯 눌러 죽였다.
집 안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유란이 목록과 윤서 메모를 빠르게 정리해 상자에 다시 넣었다.
서진은 회중시계를 움켜쥐었다.
두 번째 휘파람은 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렸다.
이번엔 대답하는 휘파람이 없었다.
노파가 아주 낮게 말했다.
“마을 바깥을 훑고 있어.”
“공시청?”
유란이 물었다.
노파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몰라. 근데 기준 밖 길을 아는 쪽이야.”
그 말은 오히려 더 위험했다.
공시청 정규 병력이라면 리듬이 있다.
공시등, 조율 장비, 측정광, 규정된 봉쇄 순서.
하지만 “기준 밖 길을 아는 쪽”이라면, 이 마을 같은 곳을 직접 뒤지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기준 바깥을 숨통 삼아 살아온 이들을 추적하는 데 특화된 손들.
민도혁이 문틈으로 바깥을 살피며 말했다.
“바로 들이치진 않아. 찾는 중이다.”
“우리 찾는 거죠.”
단휘가 말했다.
“혹은 목록.”
유란이 낮게 말했다.
집 안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
서진은 상자 위에 다시 손을 올렸다.
등록되지 못한 이름들.
이건 사람의 목록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없애야 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노파가 짧고 정확하게 말했다.
“오늘 밤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돼.”
“그럼 지금 나가요?”
서진이 물었다.
“아니.”
노파가 말했다.
“지금 나가면 바로 보인다. 새벽 직전, 물길 안개 뜰 때 움직여. 그 전까진 숨고, 그동안 다음 길을 정해.”
유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점으로 가는 다른 길, 그 다음 단계가 필요하네요.”
민도혁이 문틈을 보며 낮게 말했다.
“이 마을에서 동남쪽으로 빠지면, 장부에서 지워진 옛 역참 하나가 있어. 거기서부터는 평지 쪽 숨은 길이 이어진다.”
단휘가 중얼거렸다.
“오늘도 또 다른 길이군.”
서진은 상자를 바라봤다.
그 안엔 아직 다 읽지 않은 이름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마, 자신이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 혹은 이미 사라진 사람들과 연결된 선도 더 있을 것이다.
바깥에선 세 번째 휘파람이 울렸다.
이번에는 아주 멀게.
마치 누군가 아직 확신은 못 했지만, 분명 뭔가를 감지했다는 신호처럼.
노파가 조용히 말했다.
“이 마을은 기준 밖에 있지만, 완전히 보이지 않는 곳은 아니야. 그걸 잊으면 안 된다.”
서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기준 밖이라는 건 자유를 뜻하는 게 아니라, 언제든 다시 밀려날 수 있는 가장자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마을 사람들도, 목록 속 이름들도, 윤서도, 자신도.
모두 그렇게 살아남아 왔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한 건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이 가장자리들이 왜 반복해서 생겨났는지를 끝까지 따라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 끝에 원점이 있다면,
거기로 가는 길은 아마 더 이상 한 사람의 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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