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창작 소설] 그리니치 오차: 표준시 이전의 너 - 11장 폐기된 것들의 길
11장 폐기된 것들의 길
폐갱도 안의 공기는 오래 닫힌 책장 안쪽 냄새와 비슷했다.
흙과 돌, 금속, 오래된 목재가 한데 묵어 생긴 냄새. 그 안에 아주 희미하게 기름 냄새와 약품 냄새가 섞여 있었다. 북측 하강 통로를 지나 이곳까지 내려오면서, 서진은 몇 번이나 자신들이 이미 산의 “아래”가 아니라, 관측소라는 건물의 그림자 아래로 더 깊이 들어온 듯한 착각을 느꼈다. 위로는 관측과 설계와 봉인이 쌓여 있었고, 지금 자신들은 그 잔해가 흘러드는 배수로를 걷는 것 같았다.
민도혁이 랜턴을 높이 들었다.
폐갱도는 생각보다 넓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의 폭이었고, 벽면 곳곳엔 오래전 광맥 채취를 위해 박았던 금속 지지대가 남아 있었다. 일부는 녹이 슬어 휘었고, 일부는 아직도 단단했다. 바닥엔 광차 레일이 반쯤 묻혀 있었지만, 중간부터는 끊겨 있었다. 누군가 이 길을 더 이상 쓰지 않기로 결정한 순간 그대로 멈춰 버린 듯한 풍경이었다.
단휘가 한재록의 팔을 자기 어깨에 둘러멘 채 걸었다.
유란은 서진 바로 앞에서, 한 손엔 문서 봉투를, 다른 손엔 손전등을 들고 있었다.
한동안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10장의 문서가 남긴 여운이 아직 너무 컸다.
윤서는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사망 시각 보정 승인”이라는 문장 아래 먼저 죽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문서 아래엔 도해율의 이름이 있었다.
서진은 그 이름을 머릿속에서 여러 번 되씹었다.
도해율.
지금 자신을 쫓는 사람.
은종 봉쇄본부에서 냉정하게 추적망을 좁히던 인물.
그가 오래전 문서에도 닿아 있었다는 건, 우연이 아니라 계보일 가능성이 높다.
“도해율.”
민도혁이 먼저 그 이름을 입 밖에 냈다.
서진과 유란이 동시에 그를 봤다.
민도혁은 앞을 보며 걸으면서 말했다.
“네가 아까 문서에서 본 이름, 지금 내려온 원감시관이랑 같은 이름 맞지.”
“네.”
유란이 대답했다.
“적어도 현재 봉쇄본부 책임자는 그 이름이었어요.”
민도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은 단순한 기억 더듬기가 아니었다.
그는 어떤 확신이 자기 안에서 정리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도씨 쪽은 예전부터 내려왔어.”
그가 마침내 말했다.
“관측소가 살아 있던 시절에도, 폐쇄된 뒤에도. 정식 기록엔 거의 안 남았지. 남는다면 항상 ‘검토’, ‘상신’, ‘비공개 열람’ 같은 식으로만 남았고.”
단휘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결론은.”
“그놈은 현장 추적자기만 한 게 아니라는 거지.”
유란이 차갑게 받았다.
“우리도 그렇게 봤어요.”
“아니.”
민도혁이 말했다.
“너희는 아직 절반만 본 거야.”
폐갱도 안이 조금 더 조용해졌다.
“무슨 뜻이죠?”
서진이 물었다.
민도혁은 이번엔 곧장 답했다.
“그놈이 널 죽이려 드는 사람인지, 살리려 드는 사람인지부터 다시 봐야 한다는 뜻.”
단휘가 인상을 찌푸렸다.
“쫓아오는 놈이 살리려 든다고?”
“죽이려는 놈이면 진작 더 단순한 방법을 썼겠지.”
그 말은 날카롭게 들어왔다.
서진은 은종에서의 장면을 떠올렸다.
공시청 집행자들은 거칠었고, 봉쇄는 빠르고 철저했다.
하지만 도해율 본인은 아직 한 번도 직접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는 추적했고, 봉쇄했고, 방향을 읽었지만, 확실한 제거 명령 대신 “회수 우선”이라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유란도 같은 생각에 닿은 듯 눈을 내리깔았다.
“생체 우선, 열람 키 그다음이 아니라… 열람 키 우선, 생체 그다음이었죠.”
민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건 ‘죽여도 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더 깊은 쪽에서 널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지.”
서진은 주머니 속 회중시계를 만졌다.
차갑고, 익숙하고, 여전히 살아 있는 것 같은 금속 감각.
“확인해서 뭘 하려고요.”
민도혁은 한참 뒤에야 답했다.
“기준면 아래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유란이 낮게 숨을 들이켰다.
“설계층보다 더 아래?”
그녀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
민도혁이 말했다.
“관측소는 늘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였어. 관측, 기록, 보정, 봉인. 그런데 그 밑에 설계층이 있었다면, 설계 밑에도 뭔가 있어야 맞지 않겠냐.”
“기원.”
서진이 낮게 말했다.
승인된 기원만 허용한다.
북측 하강 통로의 문에 새겨져 있던 문장.
민도혁은 이번엔 서진을 똑바로 봤다.
“넌 벌써 거기까지 생각했네.”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한 게 아니라, 자꾸 밀려드는 감각을 겨우 말로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관측소가 던지는 질문은 늘 “어느 시간에 속하는가”였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질문은 “기준 이전을 기억하는가” 쪽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더 깊은 곳의 질문은 아마 “무엇이 처음 기준이 되었는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건 자신들이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층위였다.
폐갱도는 한참 뒤 갈림길에 닿았다.
왼쪽은 더 깊고 축축한 어둠으로 내려가는 길, 오른쪽은 약간 위로 오르며 북동쪽으로 꺾이는 길. 민도혁은 망설이지 않고 오른쪽을 가리켰다.
“북동 사면은 이쪽.”
“왼쪽은?”
단휘가 물었다.
“옛 폐기 경로.”
“폐기 경로?”
“관측 실패 재료 버리던 쪽.”
민도혁이 무심히 말했다.
아무도 그쪽을 오래 보지 않았다.
유란이 봉투를 더 꽉 쥐었다.
“계속 가죠.”
갈림길을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천장이 조금 높아지는 구간이 나왔다. 예전 정비 인력들이 쉬어 가던 자리였는지, 바위 한쪽이 벤치처럼 깎여 있었다. 민도혁이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잠깐 숨 돌려.”
단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쉬어도 돼?”
“쉬는 게 아니라 듣는 거야.”
그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이 구간에선 소리가 다르게 울렸다.
멀리서 들리던 충격음이나 군화 소리는 더 이상 없었다. 대신 훨씬 희미한 진동 하나가 위쪽 어디선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을 가진 소리. 금속과 금속이 직접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라, 시계 내부의 톱니가 아주 느리게 맞물리는 듯한 소리.
서진은 숨을 멈췄다.
그 리듬은 낯설지 않았다.
“공시 진동.”
그가 낮게 말했다.
유란이 놀라듯 그를 봤다.
“여기까지?”
“아니… 직접적인 건 아니에요. 더 오래된 거 같아요.”
민도혁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잘 듣네.”
“뭐죠.”
민도혁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바위 틈에 손을 넣어 작은 금속함 하나를 꺼냈다. 아주 낡고 얇은 상자였다. 뚜껑엔 아무 표식도 없었고, 안엔 말라비틀어진 종잇장 몇 장과 짧은 연필 조각이 들어 있었다.
“여기 남겨 둔 거다.”
그가 말했다.
“내가 아니라… 예전부터.”
유란이 조심스럽게 종잇장을 받아 펼쳤다.
그건 공식 문서가 아니라, 메모를 뜯어낸 조각처럼 보였다. 급하게 적힌 손글씨 몇 줄이 남아 있었다.
“하부 설계실 진동은 중앙 공시와 다르다.
위는 시간을 맞춘다.
아래는 시간의 기준을 고정한다.
둘을 같은 것으로 착각하면 탈출 경로를 잃는다.”
유란은 그걸 읽고 서진에게 건넸다.
글씨는 윤서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매우 비슷한 결의 글씨였다.
연구자나 기록관이 남긴 경고문처럼 보였다.
“누가 쓴 거예요?”
서진이 물었다.
민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모른다. 다만 내가 여기 남겨 두기 전부터 있었어.”
단휘가 메모 조각을 한번 보고 말했다.
“요약하면?”
유란이 짧게 정리했다.
“공시청이 굴리는 표준시 장치와, 그 밑에서 기준 자체를 붙잡는 더 오래된 장치가 따로 있다는 뜻.”
“좋아.”
단휘가 말했다.
“점점 더 기분 나빠지네.”
서진은 그 말이 이상하게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점점 더 기분 나빠진다.
그건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살아온 일상이 단순한 제도나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훨씬 오래전에 누군가 정한 “인간은 같은 시간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 위에 세워져 있었고, 그 전제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비용으로 분류되었다는 사실. 그 진실이 단계적으로 드러날수록, 분노와 두려움보다 먼저 오는 건 설명하기 힘든 역겨움이었다.
유란이 봉투 속 문서를 다시 한번 꺼내 들었다.
“도해율 검토 후 상신.”
그녀는 그 문장을 소리 없이 입술로만 되풀이했다가, 마침내 말했다.
“이건 우연이 아니에요.”
단휘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제 와서?”
“아니.”
유란이 고개를 들었다.
“이 사람은 그냥 추적자가 아니라, 문서 체계에 직접 닿아 있는 사람이에요. 윤서 건뿐만 아니라 다른 ‘보정 승인’ 문서에도 이름이 남아 있을 수 있어요.”
민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다.”
“왜 확신하죠?”
서진이 물었다.
민도혁은 한참 답이 없었다.
랜턴 불빛이 그의 얼굴 흉터를 가늘게 훑었다.
“폐쇄 직전, 관측소 아래로 한 번 내려온 놈이 있었어.”
그가 말했다.
“이름은 못 들었지. 근데 그놈이 나가고 나서부터 문서 몇 개가 통째로 사라졌어. 사라진 것 중 하나가 ‘시간 보정 승인 목록’이었고.”
유란의 눈이 좁아졌다.
“도씨 계열일 가능성이 높다?”
“높아.”
서진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도해율이 자신을 쫓는 건,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윤서가 끝내 건네지 못한 무언가를 자신에게서 확인하기 위해서일 수 있다.
그건 회중시계일 수도 있고, 무결인 반응일 수도 있고, 혹은 “기준 이전을 아직 남긴 인간”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바로 그때, 주머니 속 회중시계가 짧게 떨렸다.
틱.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였다.
서진은 천천히 시계를 꺼냈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지금은 이 떨림을 무시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다들 알고 있었다.
그가 뚜껑을 열자, 안쪽 금속면에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위로 올라가는 자를 보지 말 것.”
단휘가 인상을 찌푸렸다.
“또 경고냐.”
유란은 바로 물었다.
“언제.”
“지금.”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갈림길 왼쪽 깊은 폐기 경로 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사람 발소리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짐승도 아니다.
돌을 긁는 소리, 마른 숨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이상한 건 리듬이었다. 걷는 게 아니라, 누군가 “올라오려는 장면”만 반복 재생되는 것 같은 리듬.
민도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랜턴 내려.”
모두 즉시 불빛을 낮췄다.
어둠이 짙어졌다.
왼쪽 폐기 경로 너머에서, 희미한 회색 형체 하나가 천천히 드러났다.
사람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발은 땅에 제대로 닿아 있지 않았다.
몸은 마치 위쪽에서 떨어지다 멈춘 것처럼 한쪽이 살짝 기울어 있었고, 얼굴 부분은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흐린 빛 번짐만 있었다.
서진은 숨을 죽였다.
별이 아닌 것들.
위 관측소에서 본 잔류체와 닮았지만, 이것은 훨씬 거칠었다.
봉인실이나 안정면에 붙잡히지 못하고 폐기 경로로 흘러간 “남는 시간” 쪽에 더 가까워 보였다.
유란이 아주 낮게 말했다.
“보지 말랬지.”
서진은 고개를 약간 숙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는지, 회색 형체가 아주 미세하게 이쪽으로 얼굴 없는 머리를 돌렸다. 얼굴이 없는데도 “본다”는 감각이 분명히 있었다.
민도혁이 숨소리만큼 작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 저건 관측 대상이 아니라 폐기 잔류야. 눈 맞추면 따라붙는다.”
단휘가 비웃음 섞인 숨을 내쉬었다.
“눈도 없는데.”
“그래서 더 문제지.”
폐기 잔류체는 몇 초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더니, 이쪽으로 오지 않고 오히려 위쪽 경사로 방향으로 미끄러지듯 올라갔다. 걷는 게 아니라, 과거의 동작을 현재에 덧씌우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긴 침묵 끝에 단휘가 중얼거렸다.
“이런 건 관측소에 없었잖아.”
민도혁이 대답했다.
“저긴 붙잡힌 놈들이고, 저건 못 붙잡힌 놈들이니까.”
서진은 방금 본 형체를 떠올렸다.
누군가의 죽음 직전 장면이 잘려 폐기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조금 전 본 회중시계 문장이 단순 경고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위로 올라가는 자를 보지 말 것.
저 형체는 지금도 “올라가고 있는 장면”만 남은 존재다.
그 장면을 제대로 보면, 그 시간에 자신도 끌릴 수 있다는 뜻이다.
유란이 조용히 말했다.
“더 빨리 가죠.”
민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동 사면까지 얼마 안 남았다. 근데 나가기 전에 하나 더 봐야 할 게 있어.”
단휘가 인상을 찌푸렸다.
“또?”
“윤서가 남긴 건 문서만이 아니었어.”
민도혁이 말했다.
“적어도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땐.”
서진의 걸음이 멈췄다.
“뭘요.”
민도혁은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음성.”
정적.
“무슨 음성.”
유란이 물었다.
“정확히는… 완전한 기록은 아니고, 반쯤 끊긴 전달음.”
민도혁이 말했다.
“하부 유지반 점검 때 한번 우연히 들었어. 이름은 안 나왔지만, 말투랑 내용이 연구관 쪽 사람이었지. 그때는 누군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윤서였을 가능성이 높아.”
서진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
문자가 아니라 음성.
윤서의 육성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에.”
그가 물었다.
민도혁이 앞쪽 더 좁아지는 통로를 가리켰다.
“북동 사면 나가기 직전, 정비 중계함 하나가 있어.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어떤 날은 짧게 살아나. 완전히 재생되진 않고, 늘 같은 부분만.”
단휘가 못마땅하게 말했다.
“그걸 지금 들으러 간다고?”
민도혁이 냉정하게 답했다.
“아니. 지나가는 길에 확인하는 거지. 네가 저 문서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그냥 나가도 돼. 근데 난 보통 글보다 목소리가 사람을 더 세게 흔든다고 보거든.”
단휘는 더 말하지 않았다.
서진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문서인지, 윤서의 음성인지, 혹은 둘 다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흔적을 남겨 두고 사라졌다. 아니, 사라지도록 처리되었다.
다섯 사람은 다시 통로를 걸었다.
이번엔 더 조심스러웠다.
폐기 잔류체가 지나간 뒤라 그런지, 어둠이 한층 더 얇아진 것 같았다. 누군가 오래전 여기서 흘리고 간 마지막 몇 분이 아직 통로 벽에 배어 있는 느낌이었다.
북동 사면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구간에서, 민도혁은 오른쪽 벽에 붙은 녹슨 금속함 앞에 멈췄다. 표면엔 “중계-북동 유지선 3”이라는 작은 표식이 남아 있었다.
그는 랜턴 불빛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상자 덮개를 열었다. 안에는 끊어진 전선, 죽은 지시등, 그리고 아주 오래된 음성 기록 장치가 하나 있었다.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 반쯤은 관측소 장비 같고, 반쯤은 광산 통신기 같은 모양.
민도혁이 말했다.
“늘 되는 건 아니야.”
그는 장치 옆 작은 레버를 천천히 올렸다.
처음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다음, 잡음이 한 번 길게 흘렀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정말로 희미하게 사람 목소리 하나가 새어 나왔다.
“…아직… 들린다면…”
서진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목소리는 너무 끊겨 있어 단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첫 음절만으로도, 그는 알아봤다.
윤서였다.
유란도 그걸 느낀 듯 고개를 들었다.
단휘는 아무 말 없이 서진 쪽을 봤다.
장치는 다시 잡음을 토했다.
몇 단어가 날아갔고, 다시 음성이 이어졌다.
“…기록보다… 먼저… 죽으면…”
잡음.
“…남는 건… 시간이 아니라…”
또 잡음.
“…질문이다…”
장치가 끊길 듯 떨렸다.
민도혁이 레버를 누르며 버텼다.
“조금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주 짧은 문장이 흘러나왔다.
“…서진에게… 묻지 말고… 보여 줘…”
그 직후 장치가 완전히 죽었다.
작은 방 안은 다시 어둠과 숨소리만 남았다.
서진은 움직일 수 없었다.
기록보다 먼저 죽으면, 남는 건 시간이 아니라 질문이다.
그 문장은 지금까지 자신이 겪어 온 일들을 이상할 정도로 정확히 찔렀다.
관측소의 질문, 봉인실의 안정면, 자신을 따라붙는 선행 장면들, 7분 먼저 기록된 죽음.
윤서는 죽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기록이 사람보다 먼저 죽는 순간, 남는 것은 단순한 오차가 아니라 “계속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라는 걸.
그리고 마지막 문장.
서진에게 묻지 말고 보여 줘.
민도혁이 아주 조심스럽게 장치 덮개를 닫았다.
“내가 들은 건 늘 여기까지였어.”
유란이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왜 이제야 말했죠.”
민도혁은 짧게 대답했다.
“문서 없이 들으면 미친 소리 같으니까.”
맞는 말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사망 시각 보정 승인서가 있고, 설계실 문서가 있고, 안정면에 남은 윤서의 일부가 있고, 방금 들은 끊긴 음성까지 있다. 조각들은 아직 완전히 맞물리진 않았지만, 더 이상 우연도 환각도 아니다.
단휘가 먼저 몸을 돌렸다.
“좋아. 이제 진짜 나가자. 더 있으면 저 장치 대신 우리 목소리가 남겠어.”
유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도 마침내 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북동 사면 출구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바위 틈을 지나 마지막 철문 하나를 밀어내자, 차가운 바깥 공기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해는 이미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고, 북동쪽 산사면 아래로는 낡은 보급로 흔적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멀리선 시란제국 북부 철로의 가느다란 선이 보였고, 더 멀리에는 아직도 희미하게 제11관측소 상부 구조물이 하늘을 긁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모두가 잠시 멈췄다.
살아남아서가 아니라, 안과 밖의 시간이 너무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제11관측소 아래에선 시간이 문서와 승인과 비용으로 쪼개져 있었고, 여기선 바람과 빛과 체온이 그걸 다시 덮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한번 본 것을 다시 모른 척할 수는 없다.
서진은 북동 사면에서 마지막으로 관측소를 돌아봤다.
저 건물은 더 이상 단순한 목표가 아니었다.
세계가 왜 이렇게 만들어졌는지, 누가 비용을 정했고 누가 시계를 정했는지, 왜 자신이 살아남아야 했는지, 그 모든 질문의 입구였다.
그리고 이제 그는 안다.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정확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윤서는 “묻지 말고 보여 주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다음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문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 7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다.
유란이 조용히 물었다.
“어디로 갈래.”
단휘가 먼저 대답하려 했지만, 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도해율.”
셋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서진은 천천히 말했다.
“그 사람은 우리를 죽일 수도 있었는데 아직 그러지 않았어요. 추적도 너무 정확하고, 과거 문서에도 이름이 있어요. 저 사람은 단순히 쫓는 게 아니라, 뭔가 확인하려고 우리를 따라오고 있는 거예요.”
유란이 눈을 좁혔다.
“그래서.”
“우릴 유도하려는 걸 수도 있어요.”
서진이 말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도 그 사람이 뭘 알고 있는지 끌어낼 수 있을지 몰라요.”
단휘가 코웃음을 쳤다.
“미끼가 되자는 거냐.”
“아니요.”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이미 미끼라면, 이제 그걸 모른 척하지 말자는 거죠.”
정적.
그 말이 끝난 뒤, 바람이 북동 사면을 길게 쓸고 지나갔다.
유란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는 도망만 치는 게 아니라, 누가 우릴 어디로 밀고 있는지도 같이 읽어야겠네.”
단휘는 한참 말이 없다가 낮게 말했다.
“맘엔 안 들지만, 틀린 말은 아니야.”
민도혁은 멀리 관측소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진짜 시작이네.”
서진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주머니 속 회중시계를 한번 더 쥐었다.
금속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안쪽에서 아주 희미한 맥박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알아야 할 것은 더 이상 “왜 내가 이런 걸 보는가”만이 아니다.
누가 시계를 정했고,
누가 죽음을 앞당겼으며,
누가 지금도 자신을 어디론가 끌고 가려 하는가.
북동 사면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길고 차가웠다.
그러나 이번엔 단순한 도주가 아니었다.
처음으로, 추적당하는 자들이 추적의 방향을 되짚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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